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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It’s me, 루카

입력 2026.06.12 15:09

수정 2026.06.1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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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호 서강대 생명과학과 교수
심해 열수분출공. 위키피디아

심해 열수분출공. 위키피디아

우리는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의 처음은 어떤 모습일까?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조상은 같을까? 깊은 바다의 검은 굴뚝 같은 열수구에서 뜨거운 물이 솟구친다. 햇빛은 닿지 않고, 산소도 거의 없으며, 주변은 금속과 황 성분이 뒤섞인 낯선 세계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장소가 지구 생명의 가장 오래된 기억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인간, 고래, 소나무, 버섯, 대장균까지 오늘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거꾸로 추적하면 어느 순간 조상이 되는 한 생명체에 닿게 된다. 과학자들은 그 존재를 루카(LUCA·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루카는 정말 지구 최초의 생명체였을까, 아니면 수많은 실패와 소멸 뒤에 살아남은 단 하나의 계통이었을까?

우리의 조상은 누구인가?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하나의 가계도로 그리면,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친척들 사이에 살고 있다. 인간은 침팬지와 약 600만~700만년 전 공통 조상을 공유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개, 쥐, 고래, 새, 물고기와도 연결된다. 식물과 동물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처럼 보이지만, 더 오래전에 같은 줄기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 거대한 생명의 나무를 계속 거꾸로 올라가면 가지는 점점 줄어든다. 포유류의 가지가 하나로 모이고, 척추동물의 가지가 다시 하나로 모이며, 동물·식물·균류의 계통도 더 오래된 미생물 세계로 흘러들어간다. 마침내 모든 가지가 공유하는 한 점에서 만난다. 그곳에 ‘루카’가 있다.

루카는 ‘지구 생명체의 마지막 공통 조상’이다. 루카는 최초의 생명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루카 이전에도 원시적인 생명체나 생명에 가까운 화학 시스템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들 대부분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생명은 모두 루카에서 유래한 계통이다.

만약 어떤 형사가 40억년 전에 살았던 인물을 추적해야 한다면 무엇을 단서로 삼을까? 사진도 없다. 화석도 없다. DNA 샘플도 없다. 그런데도 과학자들은 오늘날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약 40억년 전 하나의 공통 조상인 루카로부터 유래했다고 추론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가설일까? 흥미롭게도 루카의 존재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고대 화석이 아니라 이 순간 우리 몸속 세포 안에 숨어 있다.

고세균. 위키피디아

고세균. 위키피디아

인간과 대장균은 전혀 달라보인다. 한쪽은 수십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포유류이고, 다른 한쪽은 단세포 미생물이다. 그러나 세포 내부로 들어가면 신비한 일이 벌어진다. 인간의 세포도, 대장균도, 효모도, 참나무도, 고래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유전정보를 읽는다. DNA를 RNA로 전사하고, RNA를 단백질로 번역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과정에 사용되는 유전 암호(genetic code)가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인간 세포에서 ‘AUG’는 메티오닌(Methionine)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 역할을 한다. 대장균에서도 AUG는 메티오닌을 만든다. 버섯에서도 그렇다. 심지어 심해 열수구의 고세균에서도 마찬가지다. 생명체가 서로 독립적으로 여러 번 탄생했다면 이런 공통 현상은 설명하기 어렵다. 마치 전 세계 모든 컴퓨터가 우연히 똑같은 운영체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생명 진화 역사에 남겨진 가장 오래된 지문이라고 생각한다.

루카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는 리보솜(ribosome)이다. 리보솜은 세포 안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분자 기계다. 생명체마다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보존돼 있다. 과학자들이 박테리아(세균), 고세균, 진핵생물의 유전자를 비교해보니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유전자들이 있었다. 그중 상당수가 리보솜과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였다.

이 발견은 매우 중요하다. 인간과 세균이 단순히 비슷한 생화학 반응을 사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동일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분자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이 루카를 믿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를 생각해보자. 우리 말과 영어는 문장을 만드는 순서도 다르고, 각각 고유의 규칙이 존재한다. 만약 세계의 모든 언어가 완전히 동일한 문법 체계를 공유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아주 오래전 하나의 원형 언어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것이다. 생명체는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아니면 미생물이든 모두 유전 정보를 DNA에 저장하고, 자손에게 물려준다. 생명체는 우리의 언어와 달리 ‘동일한 문법 체계’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 조상의 ‘루카’ 개념도. 김정호 제공

우리 조상의 ‘루카’ 개념도. 김정호 제공

당시에 루카는 무엇을 먹고살았을까?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놀랍게도 ‘수소’다. 수소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다. 별의 대부분은 수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태양 역시 수소 핵융합으로 빛을 낸다.

그러나 지구 초기 환경에서 수소가 중요한 이유는 조금 다르다. 지구 내부의 암석은 바닷물과 만나면서 특정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수소가 생성된다. 오늘날에도 해저에서는 이런 반응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특히 초염기성 암석과 바닷물이 반응하는 ‘사문암화(serpentinization)’ 과정에서는 상당량의 수소가 생성된다.

연구자들은 이 수소가 최초 생명체의 연료 역할을 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이 음식 속 포도당을 이용하듯, 루카는 수소를 이용해 에너지를 얻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 생물 중에도 여전히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심해 열수분출공 주변의 미생물들 가운데는 수소와 이산화탄소만으로 생존하는 종이 적지 않다.

심해는 빛도 없고, 차갑고, 압력이 높은 곳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생명체가 살기 가장 어려운 환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명체에게 꼭 햇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1977년 태평양 갈라파고스 해령 근처에서 심해 열수분출공이 발견됐을 때 과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곳에서는 태양 빛이 전혀 도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생태계가 형성돼 있었다. 거대한 관벌레와 조개, 새우, 박테리아가 밀집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 생태계를 떠받치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지구 내부의 화학에너지였다.

이 발견은 생명의 기원 연구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는 얕은 바다나 해안가 웅덩이에서 생명이 시작됐을 것이라는 가설이 주류였지만, 이후 심해 열수분출공도 유력한 후보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40억년 전, 심해 열수분출공 주변에서 놀고 있던 루카가 반갑게 우리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It’s me,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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