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플라이룸 ](79) 논문 1편에 17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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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플라이룸 ](79) 논문 1편에 1700만원

입력 2026.06.05 14:56

수정 2026.06.0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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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재 낯선 과학자
AI로 생성한 학술 생태계의 위기 그래픽. 김우재 제공

AI로 생성한 학술 생태계의 위기 그래픽. 김우재 제공

나는 초파리를 연구한다. 몸길이 2~3㎜짜리 파리 한마리에서 유전자 하나의 기능을 알아내는 데 몇해가 걸리기도 한다. 그 지루하고 외로운 노동 끝에 겨우 논문 1편이 나오고, 그것은 다른 연구자의 실험 위에 벽돌처럼 한장 얹힌다. 뉴턴이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다”고 했을 때, 그 거인은 앞서간 동료들이 정직하게 쌓아올린 벽돌의 더미였다. 과학이란 본래 그렇게 한장 한장 더디게 쌓아 올리는 탑이었다.

오픈액세스-청구서의 수신인만 바뀐 가짜 혁명

그런데 지난 2월, 그 어깨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음을 알리는 선언이 나왔다. 세계 최대 연구기관인 중국과학원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같은 일류 오픈액세스 저널 30여곳에 더는 논문 게재료를 대주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지난해 중국 학자들이 쏟아낸 오픈액세스 논문은 전 세계의 3분의 1, 그 게재료로만 1조원 넘는 돈이 빠져나갔다. 가장 권위 있다는 그 저널들에 등을 돌린 이유는 단 하나, ‘가성비’였다. 부실하거나 가짜인 저널이어서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과학자들은 영향력지수의 노예로 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오픈 액세스 게재료의 노예가 됐다.

오픈액세스는 지식해방의 혁명으로 시작했다. 2000년대 초 부다페스트와 베를린에 모인 학자들은, 세금으로 만든 지식을 왜 돈 낸 사람만 읽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지극히 옳은 분노였다. 누구나 공짜로 읽을 수 있게 하자.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바뀐 것은 착취의 구조가 아니라 청구서의 수신인뿐이다. 예전엔 논문을 ‘읽는 자’가 구독료를 냈다면, 이제는 ‘쓰는 자’가 게재료를 낸다. ‘네이처’에 논문 1편을 싣는 값이 1700만원, 신참 연구원 반년치 월급이다. 전 세계가 이 게재료로 쓴 돈은 4년새 1조2000억원에서 3조4000억원으로 3배 가까이 불었다. 그사이 엘스비어의 모회사는 38%가 넘는 영업이익률을 거뒀다. 구글도, 애플도 넘어서는 숫자다. 인류의 지식을 다루는 일이 스마트폰이나 검색 광고를 파는 일보다 남는 장사가 된 것이다.

따져보면 기가 막힌 일이다. 연구비는 국민 세금이고, 논문은 과학자가 쓴다. 그 논문을 심사하는 일조차 과학자가 공짜로 해준다. 우리가 동료의 원고를 밤새 읽어 학문의 품질을 떠받치는 동안, 그 노동의 열매는 고스란히 출판사 주주의 배당으로 흘러간다. 출판사가 하는 일이라곤 PDF에 자기 로고를 박는 것뿐인데, 우리는 그 PDF를 ‘모두에게 공개’하겠다며 또 한 번 돈을 갖다 바친다. 출판사가 돈을 더 버는 길은 분명하다. 논문을 더 많이 찍어내는 것이다. 많이 찍어낼수록 1편에 들이는 심사의 밀도는 옅어진다. 지식의 민주화는 어느새 지불 능력의 위계화로, 다시 물량의 경제로 둔갑해버렸다.

일러스트 | NEWS IMAGE

일러스트 | NEWS IMAGE

현장의 연구자라면 누구나 매일 받아보는 e메일이 있다. “존경하는 박사님, 귀하의 탁월한 업적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학술지가 보내온 낯간지러운 초대장이다. 약간의 게재료만 내면 며칠 만에 논문을 실어주겠다는 이런 저널을 우리는 ‘약탈적 학술지’라 부른다. 심사라는 학문의 최소한을 건너뛰고 돈만 챙기는 가짜 저널들이다. 2010년 미국의 도서관 사서 제프리 빌이 이 말을 만들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명단은 출판사 1000곳 가까이 불어났고, 학자들은 그것을 경전처럼 떠받들었다. 한 추산으로 약탈적 저널의 논문은 2010년 5만여편에서 2014년 42만편으로 폭증했고, 그 저자의 3분의 2가 아시아·아프리카 출신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입에 잘 올리지 않는 진실은 따로 있다. ‘약탈적’이라는 낙인은 거의 언제나 변방을 향한다는 사실이다. 1700만원을 받는 ‘네이처’는 ‘명문’이고, 몇백달러를 받는 나이지리아의 작은 저널은 ‘약탈자’다. 그 경계선은 학문의 질이 아니라 권력의 지도를 따라 그어진다. 어떤 연구자들은 ‘약탈적’이라는 말 자체가 가난하지만 정직한 제3세계 저널과 진짜 사기꾼을 한 솥에 뭉뚱그리는 잘못된 이름이라 비판한다. 또 어떤 이는 이 저널이 차라리 ‘패러디’에 가깝다고 본다. 정상이라는 출판 체제 역시 지식을 상품으로 팔고 중심부만 떠받든다는 불편한 진실을, 이들이 거울처럼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탈자를 손가락질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풀리지 않는다. 그들은 병을 만든 자가 아니라 병의 증상일 뿐이다.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누가 약탈자인가’가 아니라 ‘누가 이 많은 연구자를 약탈자의 품으로 떠미는가’이다.

논문이 화폐가 될 때

답은 단순하다. 논문이 진리를 적는 그릇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화폐가 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줏단지처럼 떠받드는 영향력지수란 한 사기업이 만들어 파는 상품일 뿐인데, 과학자들은 그 숫자를 향해 내달리는 경주마가 돼버렸다. ‘셀’, ‘네이처’, ‘사이언스’에 논문 1편 실으면 장원급제라도 한 듯 추앙받고, 그러지 못하면 연구비도 자리도 위태롭다. 그 천박함의 끝에서 우리는 ‘학술용병’을 본다. 강의실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외국인 교수가 6년간 논문 496편을 어느 대학 이름으로 찍어내자, 그 대학의 순위가 올랐다. 숫자가 목적이 되는 순간, 약탈적 저널도 거기 빌붙어 자라는 곰팡이가 된다.

그렇다면 길은 없는가. 나는 몇해 전 태국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 그들은 생물학을 서구의 논문 게임이 아니라 자국의 식량과 농업이라는 절박한 문제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진짜 대안은 더 정교한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각자가 제 발밑의 문제를 푸는 주체적인 과학 생태계다. 사이허브도, 모든 논문을 즉시 공개하자는 국제협약도 있지만, 평가제도와 출판 과점의 사슬을 끊지 않는 한 다 헛일이 될 뿐이다. 한 연구자의 말처럼 “딱 걸렸으니 값 내리겠다”며 머리 숙일 출판사는 없다.

그래도 중국과학원의 선언은, 우리가 알면서도 외면해온 진실을 처음으로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과학이 지식에 가격표를 달았고, 그 가격표가 이제 과학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진실을 이제 우리 모두 회피할 수 없다. 초파리로 노벨상을 받은 허먼 멀러가 핵실험이 유전자에 남길 상처를 알리기 위해 평생 광장에 섰던 것처럼, 보통 과학자 역시 더는 무균실 안에 숨어 있을 수 없다.

나는 다시 내 초파리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 또한 생활형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몇해에 걸쳐 벽돌 한장을 빚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 그 벽돌이 정직한 탑이 될지, 남의 금고를 채우는 돌멩이가 될지는 실험대가 아니라 우리가 광장에서 던지는 질문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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