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의 책방 ‘어나더페이지’ 창가에 박노해 시인의 시 일부가 쓰여 있다. 송혜림 제공
아름다운 섬 제주. 많은 사람에게 제주도는 하나의 단일한 섬이다. 그러나 섬 내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여러 섬의 군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섬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다양하고도 개성 있는 360여개의 오름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감탄하는 제주의 절경은 수천년간 이루어진 화산 활동과 그에 따른 퇴적, 그리고 그 환경에 기어코 뿌리를 내린 생물이 만들어낸 결정체다. 이 뒤엉킴에 인간이 마지막에 합류했다. 생태가 비·생물 간의 변화와 적응의 역사로 설명되듯이 제주의 땅, 그리고 땅에 자리 잡은 마을도 고유한 역사 없이는 충분하게 읽어낼 수 없다.
그러나 제주 땅은 ‘제주4·3’ 사건으로 거대한 지형 변화를 맞이했다. 제주의 ‘폭도’를 소탕한다는 1948년 ‘초토화 작전’에서 무장대는 물론 군·경·서북청년단의 횡포를 피해 산에 오른 민간인들, 소개령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떠나지 못한 중산간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 또한 산과 ‘내통’했다고 의심되는 마을을 불태워 인적·물적 자원을 끊고 ‘입산자’를 고립시켰다. 이렇게 전소돼 제주가 ‘잃어버린 마을’은 당시 존재했던 163개의 마을 중 86개에 달한다.
사라진 마을터 몇곳에는 안내판이나 표지석이 세워졌지만, 제주의 부동산 열풍으로 그 흔적마저 소멸한 곳이 많다. 마을의 파괴는 주거라는 물리적 조건이 손상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4·3의 광풍을 통과하며 살아남은 자에게는 고통뿐만 아니라 상호 간 적대와 불신이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제주를 휩쓴 개발의 광풍은 자연과 인간이 맺던 상생관계를 단절시키고 땅의 생태적 가치를 재화로 대체시켰다. 이는 제주 마을이 상징했던 전방위적인 공동체 삶이 와해됨을 의미했다.
서점의 섬, 땅의 탈환
제주도는 전국에서 인구 대비 서점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역서점 실태조사’에서 2022년에 이어 2024년에도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2024년 전국 평균이 1인당 5.44개인데 반해 제주는 12.38개에 이른다. 월등히 높은 이 수치는 도내 독서율이나 책 구매율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외부 의존도가 높은 제주의 경제 구조와 관련된다는 해석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제주 서점은 성수기와 비수기의 차이를 체감할 만큼 관광객의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서점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콘셉트와 큐레이션으로 섬 ‘바깥’ 손님을 끌어당긴다.
오늘날 제주 서점은 하나의 관광 코스로 구성될 정도로 사랑받는 장소가 됐다. 제주가 상징하는 ‘쉼’을 문화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또한 제주에서는 서점 간 네트워크를 강화해 20여개의 서점이 참여하는 한 달간의 ‘제주冊산책’을 진행하거나 출판사와 책방, 창작자를 통해 제주 서점의 공생적 미래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서점은 지속될 수 없다. 많은 서점이 제주 땅의 기억을 수호하고 있다. 모슬포의 ‘어나더페이지’는 4·3 당시 주민을 집단 수용했던 고구마절간창고와 접해 있다. 이곳에 수용된 대부분 사람은 예비검속 당시 섯알오름으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자기 죽음을 알리기 위해 달리는 트럭 밖으로 고무신과 옷가지를 던진 긴박한 마음과 길 위에 떨어진 소지품을 뒤쫓아간 가족들의 마음이 서점과 섯알오름 사이의 먼 간극을 채운다.
제주 제주시 구좌읍의 책방 ‘제주 풀무질’에 ‘일꾼 은종복’이 권하는 도서가 진열돼 있다. 송혜림 제공
서울에서 이주해와 이젠 제주라는 앞글자가 더 친숙한 ‘풀무질’은 1932년 제주 잠녀(해녀)들의 투쟁을 기리는 기념탑에 가까이 있다. 이 투쟁은 일제의 착취에 맞서 해녀조합의 공정한 거래권을 쟁취하려 했던 잠녀들의 투쟁으로 일제강점기 여성이 주도한 최대 규모의 항일 운동이다. 세화장을 점령해 구호를 외쳤던 잠녀 1000여명의 발걸음 소리를 상상해볼 수 있다.
‘보배책방’이 있는 납읍리는 4·3 당시 전소되지 않은 마을 중 한 곳이다. 소개가 끝나고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이 무장대로부터 마을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담이 서점 근처에 남아 있다. 군경의 감시하에 주민들이 밤낮없이 돌을 나르고 보초를 서야 했던 ‘전략촌’의 과거가 말 없는 돌 위에 서려 있다.
제주의 역사를 되짚으려는 노력은 책방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제주 서점 어디를 가든지 책장 한편에는 4·3과 기후·생태 문제, 그리고 평화를 강조하는 큐레이션을 볼 수 있다. ‘가치’에 주목하는 방향성은 제주 서점에 있어 자연스러운 귀결일지 모른다. 제주에 삶의 터전을 가진 이는 땅의 문제를 다르게 감각한다. 난개발되는 자연경관을 가까이서 목격하며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매 순간 체감하기 때문이다. 동북아 안보라는 정치적 명제나 관광 활성화와 투자 유치 같은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을 생활 속에서 느낀다.
이 때문에 제주에서 지속되는 일상의 혁명이란 땅과 관련된 것이 된다. 땅을 지키고 살리는 것, 땅과 절연된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 땅의 역사를 올바로 기억하는 것. 4·3은 ‘우리 부락에서 젤 똑똑한 청년들은 그때 다 죽어서’로 말해진다. 일제강점기 제주 각 마을의 야학은 민족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실천적 장소로, 지식뿐만 아니라 독립과 자치의 정신을 대물림하는 역할을 해왔다. 오늘 제주의 서점은 이 역할을 이어받는 장소일 것이다.
책과 서점으로 지킨 제주
제주는 책과 서점을 매개로 마을을 지켜냈던 기억이 있다. ‘강정평화책방’이 대표적 사례다. 해군기지 건설의 저지 운동이 격렬했던 2013년, 강정에는 평화책방이 만들어졌다. 마을에 상주하는 무장 경찰력이 증가하고,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운동으로서의 책방 만들기가 추진된 것이다. 해군기지에 찬/반으로 갈리는 주민 간 분열도 심했지만, 책방을 거점으로 강정을 문화 공동체의 마을로 꾸려나가는 안에는 대부분 공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강정평화책방’은 길가에 개방된 책장을 갖추고 주민과 손님이 뒤섞여 독서와 휴식, 그리고 운동을 도모하는 마을 내 작은 ‘중립지’가 됐다.
곧이어 ‘강정책마을 십만대권 프로젝트’가 전개되며 전국 각지에서 강정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염원이 책의 물성으로 모여들었다. 평화책마을 운동을 주도했던 함성호 시인은 책을 읽는 행위가 제주의 땅을 텍스트로 재독하게 만드는 의미가 될 것이라 믿었다. 비록 ‘강정평화책방’은 2018년 공간 임대 문제로 문을 닫았지만, 이 실천은 땅을 지키고 선 제주 서점과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길 속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