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군의 공습 후 연기가 치솟는 레바논 마을. AFP 연합뉴스
시간을 거슬러 100년 전 중동으로 간다. 당시 중동과 아랍권은 400여 년간 지속한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며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사라진 자리는 영국과 프랑스의 깃발로 채워졌다. 카이로에서 바그다드, 다마스쿠스에서 알제까지 아랍인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땅은 거의 없었다. 현재의 이란인 페르시아, 아라비아반도의 이븐 사우드 왕국, 신생 터키공화국 정도만 직접 지배를 면했을 뿐이다.
오스만 제국은 16세기 이래 중동과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지배했다. 완벽한 통치는 아니었지만, 이 광대한 제국은 수많은 민족과 여러 종교를 하나의 질서 안에 묶어두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제국은 안팎의 압력으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럽 열강은 “유럽의 병자”라 불리던 오스만 제국을 잠식해 들어갔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 1881년 튀니지를 장악했다. 이탈리아는 1911년 리비아를 빼앗았다. 영국은 1882년부터 이집트를 사실상 점령하고 있었다. 결정타는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독일·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패전하면서 400년 제국의 마지막 기반마저 무너졌다.
1920년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 영토를 사실상 해체했다. 1923년 로잔 조약으로 터키공화국만이, 현재 튀르키예의 영토인 아나톨리아를 지키는 데 겨우 성공했다. 아랍 세계가 차지하던 오스만의 나머지 영토는 영국과 프랑스 손에 넘어갔다.
이 재편의 핵심에는 1916년에 맺어진 비밀 협정인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있었다.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가 서명한 이 문서는,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 중동의 미래를 영국과 프랑스가 나눠가진 거래였다.
약속된 독립, 역사적 배신으로
협정의 내용은 간단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몫,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몫. 나머지 아라비아반도는 명목상 아랍 자치 구역으로 두되, 실질적인 영향력은 양국이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지도 위에 자와 연필로 쭉 그어진 경계선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와 종교, 부족, 역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더 큰 배신은 따로 있었다. 영국은 전쟁 중 아랍 부족들에게 오스만에 맞서 싸워주면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랍인들은 그 약속을 믿고 영국 편에서 싸웠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약속과 배치되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이 협정을 두고 “역사적 배신”이라고 부른다.
봉쇄된 호르무즈 해협에 선박들이 머물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0년대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철수하면서 시리아와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이 독립을 맞이했다. 이는 유럽 제국주의의 직접적 지배가 끝나고 새로운 국가들이 국제사회에 등장한 시기였다. 1950~1960년대에는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대거 독립했는데, 특히 알제리 전쟁은 가장 치열한 투쟁으로 기록된다. 이 시기는 민족주의와 반식민지 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1970년대에는 걸프 지역 소국들이 독립하면서 석유 자원의 중요성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카타르와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등이 이 시기에 독립했다. 그 후 석유 경제는 세계 질서 속에서 중동 지역의 전략적 위상을 강화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했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독립은 국민에게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식민지 시대의 그늘은 사라지지 않았고, 새로운 형태로 이어졌다. 독립 이후의 비극이 시작됐다.
식민지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종주국들은 강력한 군대와 경찰, 정보기관, 행정 시스템을 만들어 현지인들을 통제했다. 독립 후에도 이 구조는 대부분 그대로 남았다. 다만 지배자가 유럽인에서 현지 엘리트로 바뀌었다. 군부 출신 지도자나 독립 전쟁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국가를 위에서 강하게 움켜쥐는 권위주의 체제가 자리 잡았다. 이집트의 나세르와 리비아의 카다피, 시리아의 아사드 가문처럼 한 사람이나 한 가족이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독립 이후 정치·경제 권력은 극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됐다. 대통령과 군부, 왕족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부유층이 국가 자원과 재정을 나눠가졌다. 특히 석유 수입은 국민 전체가 아닌 소수의 권력으로 집중됐다. 국영 기업은 측근에게 맡겨졌으며, 사업 기회는 선점됐고 권력은 가족에게 세습되기도 했다. 결국 국가는 이름만 남고 실질적으로는 소수만을 위한 체제가 됐다.
석유 수입, 소수 권력에 집중
많은 지도자가 민주화를 약속하며 선거와 의회제도를 도입했지만, 이는 대부분 형식에 불과했다. 선거는 조작되고 반대파는 탄압됐으며 언론과 집회는 통제됐다. 국제사회 압력에 따라 부분적 개방을 시도했지만, 권력은 내려놓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구호로만 존재했다.
이러한 모순은 2011년 ‘아랍의 봄’에서 폭발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시위가 이집트와 리비아, 시리아 등으로 급속히 확산했으나, 대부분 실패하거나 극심한 혼란으로 끝났다. 오랜 세월 쌓인 불만이 폭발했음에도, 권위주의의 뿌리가 너무 깊어 쉽게 바뀌지 않았다. 튀니지가 ‘아랍의 봄’에서 유일한 성공 사례로 평가받지만, 지속적인 경제난 속에서 정치적 불안정은 여전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진행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독립은 형식적인 주권만 회복했을 뿐 실질적인 국민 주권과 자유는 미뤄진 비극의 역사가 됐다. 식민 지배자가 물러난 자리를 현지 권위주의 엘리트가 차지하면서 국민은 권력으로부터 여전히 소외됐다. 엘리트들은 자원과 금융, 토지 분야에서 자신의 이익을 선점하는 지대추구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 지역의 역사는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진정한 민주화란 단순히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배제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포용적 사회를 만드는 내부 개혁의 과정이다. 개혁의 핵심은 경제적 기회를 보다 공정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민중 소외 구조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중동의 평화는 멀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