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권리인가, 발전인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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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권리인가, 발전인가 ①

입력 2026.06.05 14:46

수정 2026.06.0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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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박이대승의 기묘한 제도]① 권리인가, 발전인가 ①
지난 5월 20일 경기고용노동청에서 삼성전자 사측 대표교섭위원인 여명구 DS(디바이스솔루션·반도체 사업 담당) 피플팀장과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 최승호 위원장,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잠정합의안 합의 후 기자회견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난 5월 20일 경기고용노동청에서 삼성전자 사측 대표교섭위원인 여명구 DS(디바이스솔루션·반도체 사업 담당) 피플팀장과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 최승호 위원장,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잠정합의안 합의 후 기자회견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한동안 삼성전자 파업이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기업만큼 노동도 존중돼야 하고, 노동권만큼 기업 경영권도 존중돼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기업 경영권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과연 노동권과 기업 경영권이 서로 대립하는 것인가? 이번 칼럼에서 이 문제를 다루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한국 제도가 권리를 다루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보자.

법의 목적

한국 법의 대부분은 제1조에서 목적을 밝힌다. 이런 형식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만 있는 특수한 것도 아니다. 미국이나 독일 법 중에도 목적에 관한 규정에서 시작하는 것이 있고, 프랑스 법전(code) 중에도 해당 법전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어쨌든 한국처럼 모든 법이 목적을 규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법의 기본 성격을 이해하기에는 편리하다.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법의 목적을 ‘당연한 소리’ 정도로 넘기고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텐데(나 역시 대부분 그렇게 한다), 그래도 꼼꼼히 읽어보면 여러 흥미로운 지점을 찾을 수 있다. 그중 하나가 ‘권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노동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들으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라고 답할 사람이 많겠지만, 근로기준법 제1조(목적)는 권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법은 헌법에 따라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며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행법의 기원은 1953년 근로기준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법체계와 내용은 대폭 달라졌지만, 목적은 거의 그대로다. 최저임금법의 목적도 비슷하다. “이 법은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하여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도 ‘최저임금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사회보장기본법의 목적은 다소 예외적이다. “이 법은 사회보장에 관한 국민의 권리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을 정하고 사회보장정책의 수립·추진과 관련 제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복지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소 놀랍게도, 이 법이 처음 제정된 1995년부터 시민의 권리와 국가의 책임이 목적에 명확하게 규정돼 있었다. 한국 법 중에는 권리 개념을 혼란스럽게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사회적 권리들(social rights)을 이토록 정확한 언어로 표현한 법이 있다는 사실이 다소 놀랍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2000년에 제정된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서는 시민의 권리와 국가의 책임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법은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이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활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권리에 우선하는 발전

방금 사례로 든 법들을 같은 방식으로 분석할 수는 없다. 앞의 두 가지는 노동자와 사용자의 권리-의무 관계를 다루고, 뒤의 두 가지는 시민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노동 관련 법률만 살펴보자.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의 목적에 권리라는 용어가 명시적으로 표기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 법들이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목적에서 권리를 언급하는 것이 사족일 수도 있다. 법에 규정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권리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최저임금법에는 권리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이 법은 당연히 ‘최저임금을 받을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최저임금을 지급할 사용자의 의무’를 요구한다.

권리라는 말의 부재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발전’에 대한 언급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의 목적이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인 것은 과연 타당한가? 권리와 발전은 전혀 다른 가치 체계를 전제한다. 이 둘은 서로 부합할 때도 있지만, 빈번히 충돌하기도 한다. 노동자와 사용자가 노동자의 건강을 대가로 더 높은 임금을 제공하는 노동조건에 합의했다면, 법은 이를 허용해야 하는가? 권리와 발전 중 어느 쪽에 기초하는지에 따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근로기준법은 노동자의 권리와 경제 발전 중 어느 쪽을 우선적 가치로 규정하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경제 발전이다. 이 점은 제11조(적용 범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권리에 우선성을 부여했다면, 4인 이하 사업장을 법의 적용 범위에서 제외하는 규정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조항은 한국 노동법이 발전의 논리에 따라 노동자의 권리를 선택적으로 보장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저임금법의 목적은 더 흥미롭다.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하는 것은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위한 것이고, 이는 결국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돼 있다. 즉 법의 최종 목적은 ‘발전’이다. 이에 따르면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지 않는 최저임금 보장은 무의미할 것이다. 이는 ‘모든 노동자는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의 기본 원칙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최저임금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최저임금제도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해 놓았다. “1. 저임금 해소로 임금 격차가 완화되고 소득분배 개선에 기여 2. 근로자에게 일정한 수준 이상의 생계를 보장해줌으로써 근로자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근로자의 사기를 올려주어 노동생산성이 향상 3.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경쟁방식을 지양하고 적정한 임금을 지급토록 하여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고 경영합리화를 기함.” 이 소개글을 읽으면 최저임금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 헷갈리게 된다. ‘근로자의 사기’를 올리고, ‘공정한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노동생산성을 향상하고, 경영합리화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는 노동자가 아니라 사용자와 기업을 위한 것 아닌가?

‘권리인가, 발전인가?’는 한국 법과 제도의 성격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이다. 이에 따라 사회보장 관련 법과 제도를 살펴보자(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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