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지난 5월 26일 서울 강남구 조선팰리스호텔에서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논란과 관련해 사과문 발표를 위해 단상에 오르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는 다시 봐도 참 잘 만든 작품이다. 야구계 이면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사고에 대한 촘촘한 취재, 언더독 서사, 주인공들의 매력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특히 자신을 압박하는 야구단 사장 권경민의 말을 받아치는 주인공 백승수 단장의 대사는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명언이 많았다.
“말을 잘 들으면 부당한 일을 계속 시킵니다. 자기들의 손이 더러워지지 않을 일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된 조직이면, 말을 안 들어도 일을 잘하면 그냥 놔둡니다.”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 놓고 자기들이 3루타를 친 줄 압니다. 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자랑스러워하는 꼴은…. 보기 민망하죠.”
기자생활을 30년 가까이 하면서 ‘3루에서 태어난 사람’을 몇몇 만나봤다. 재계에서는 총수 일가일 것이고, 정계로 치면 부친에게 지역구를 물려받아 대대손손 권력을 누리는 2세 정치인들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말을 아끼고 의식적으로 겸손함을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신이 진짜 3루타를 친 줄 아는 사람이 꽤 많았던 거 같다.
사실 평범한 사람들에게 ‘3루’ 운운하는 것 자체가 팔자 좋은 이야기다. 무한경쟁의 세상, 우리는 1루에서만 태어나도 감지덕지한다. 일단 진루는 한 상태에서 삶을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는 ‘투스트라이크 노볼’의 조건에서 타석에 들어선다. 공 한개만 놓쳐도 삼진아웃을 당하는 탓에 매 순간이 절박하다. 때론 ‘3루에서 태어난 자들’의 부당한 지시도 거부할 수 없다.
최근 스타벅스의 ‘5·18 탱크데이’ 논란을 보면서 <스토브리그>를 떠올렸다. ‘3루에서 태어났으나, 3루타를 친 줄 아는 사람’이란 말은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프로야구 구단주여서만은 아니다. 은둔하는 다른 재벌들과 달리 그는 삶을 드러내놓고 즐겼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화려한 일상을 자랑하고 유명인들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때로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도 했다.
하지만 그가 SNS에 수차례 올린 ‘멸공’ 게시글, 한국판 마가(MAGA)로 불리는 ‘빌드업코리아’ 행사에 보낸 축사 영상 등이 알려지면서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한때나마 대중으로부터 ‘용진이 형’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착각했던 것 같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은 3루타를 쳤기 때문이 아니라 3루에서 태어났기 때문인 것을.
정 회장은 5월 26일 “이번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 내부 시스템과 리스크 관리 체계를 근본부터 다시 점검하겠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러면서도 신세계그룹은 이 사건이 고의가 아니었으며, 정 회장과도 무관하다고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이 그간 쌓아온 극우 언행이라는 본질적 리스크가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사달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무관하다. 리스크 관리 체계를 점검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실무진 잘못을 회장이 대승적으로 사과한다는 모양새로 비쳤다. 그는 여전히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이 3루타를 친 것이 아니라 3루에서 태어났음을.
이용욱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