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초호황의 과실, 분배 놓고 백가쟁명식 논의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한번은 짚고 갈 문제
지난 4월 30일 경기도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로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전자의 ‘춘투’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삼성전자 노조(초기업노조)는 성과급의 상한선을 없애고, 영업이익의 15%를 성과급 재원으로 활용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사측은 영업이익 10%에 업계 최고 대우를 제안했다. 1인당 평균 6억원 전후로 예상되는 올해 SK하이닉스의 성과급만큼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DS) 직원도 받게 되는 셈이다.
평범한 직장인이 두 기업 성과급만큼 모으려면 최소 12년에서 길게는 40년이 걸린다. 전례 없는 액수라 전 국민의 화제가 되고 있다. 성과급 자체를 보기 힘든 중소·중견기업 직장인은 상대적 박탈감을 크게 느낀다. 삼성전자 메모리와 비메모리 사업부의 성과급 격차가 클 경우 내부 갈등도 예상된다. 전문가 사이에서는 반도체 장기호황의 과실을 누구와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두고 논의가 분분하다.
“영업이익 일부 ‘반도체 상생 기금’ 출연 등 사회 환원해야”
논쟁의 한편에서는 노사 자율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른 한편에는 국가대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공동체적 분배론이 자리한다. 그 사이에 주주 이익 침해 우려, 사업부 간 격차, 미래 투자 재원, 무엇보다 ‘명분과 국민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치경제학자인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은 주주와 노조 요구 모두에 비판적이다. 주주는 최후의 청구권자로서 위험을 크게 부담하므로 이번 같은 호황기에는 주주의 배당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도, 사업부별 차등을 주장하는 과반 노조의 논리도 반박했다.
소액주주는 잔여 청구권자라기보다 주가가 내려가면 바로 주식을 팔고 떠나는 이들이 많아 이들에게 과하게 돈을 배당하면 미래를 대비한 투자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군다나 지금의 삼성전자 성과급 제도는 영업이익에서 법인세와 주주의 기대이익을 포함한 자본비용을 뺀 후 남은 부분에서 준다는 점에서 흑자를 내도 성과급을 전혀 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SK하이닉스처럼 영업이익에 직결된 방식으로 바꿔 성과급 제도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노조의 주장이 일견 타당하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마지막까지 회사를 지키는 사람들은 지배주주와 노동자들이다. 특히 노동자는 막상 회사가 힘들어지면 임금이 깎이거나 해고되는 등 가장 큰 위험 부담을 짊어진다”고 말했다.
다만 “삼성전자 정규직 직원만이 아니라 사내하청 직원도, 협력업체·공급업체도 위험을 짊어지고 있다”면서 “이들은 지금 완전히 배제돼 있는데, 똑같이 성과를 배분받을 명분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업부별 성과급 지급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더했다. 우연히 메모리사업부에 속했거나 속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과급에 차이를 두는 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존 롤스에서 마이클 샌델로 이어지는 정의론을 언급했다. 개인의 소득과 인생의 성패가 본인이 통제할 수 없는 ‘운’에 크게 좌우된다면, 이를 오롯이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른 결과라고 보고 모든 보상을 독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다.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해도 두 기업이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만나 이 정도로 대반전할 거라고는 누구도 자신 있게 예상하지 못했다. 그간의 투자와 기술 개발의 노력만큼 시대적 행운의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샌델은 우발적인 요소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으니, 그 우연을 공동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정 박사도 비슷하게 초호황기 영업이익의 일부를 ‘반도체 생태계 상생 기금’으로 출연하자는 안을 냈다.
가령 영업이익률이 25%를 초과할 경우 영업이익의 5%를, 30%를 초과할 경우 영업이익의 10%를 반도체 생태계 상생 기금을 내도록 설계할 수 있다. 이를 법인세 감면 혜택에서 소외됐던 협력업체·하청업체를 위한 자금 지원과 공동 연구개발, 반도체 석·박사 장학금과 연구비, 해외 석학 초빙, 산학협력 프로젝트 등에 쓰자고 했다. 정 박사는 “자선사업을 하라는 게 아니라 삼성전자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공익적인 과학기술 투자를 하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부 현금, 일부 주식으로 지급하는 게 바람직”
인공지능 반도체에 들어갈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 폭발로 초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언제 대체 기술이 등장해 판이 바뀔지 모른다. 미래를 대비한 투자와 협력사와의 동반 성장으로 반도체 생태계의 기초 체력을 다져야 한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노사관계연구본부 본부장은 최종 결정은 노사가 하지만, 국민 정서와 반도체 산업 환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후폭풍이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도체 산업 성과는 해당 기업의 노사만 열심히 해서 만든 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과거 조선업의 경험을 떠올렸다. 오 본부장은 “잘 나갈 땐 자기들만 과실을 나누고, 어려울 땐 국가에 손을 내밀면 공감을 받을 수 있을까. 호황기에 조선업 전체 발전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 대비했다면 비판이 덜 했을 것”이라면서 “반도체·자동차·조선이 국가 기간 산업이라는 이유로 지원을 받고 있지만 그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산업과의 형평성을 고려하면 공익과 산업 생태계에 투자하며 명분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상 방식의 변화도 권했다. 성과급 전부를 현금으로 주기보다 일부는 양도제한조건부 주식(RSU·일정 기간 재직 등 조건을 충족하면 지급되는 주식) 같은 주식으로 보상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노조가 성과급 명분으로 제시하는 인재 이탈을 막는데도 이 방법이 더 타당하다. 오 본부장은 “현금은 올해 받고 떠날 수 있지만, 우리사주나 RSU같이 회사의 미래 가치를 공유하는 방식이 노사 모두에 이득이다”라고 말했다. RSU는 미국 빅테크들이 주로 사용하는 보상 방식이기도 하다.
재정·산업정책 관점에서 현재의 반도체 세액 공제 제도 자체를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초거대기업에 투자 세액 공제는 더는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법인세를 깎아주는 이유는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서인데 300조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회사에서 10조~20조원을 깎아준다고 더 투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세액공제를 해줘도 그만큼의 투자 효과는 없는데, 재정 여력을 갉아먹을 필요는 없다”면서 “초거대 기업을 위한 감세정책 대신 세수 여력을 탄탄히 한 후 어쩔 수 없이 불황이 왔을 때 지원을 해주는 원칙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지원을 해도 단순한 이전 지출, 보조금 지급이 아니라 정부가 투자해 일정 정도의 이익률을 기록하면 이를 다시 정부가 회수하는 투자의 형태가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반도체 분야의 초과세수를 기반으로 ‘국민배당금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AI 인프라 시대의 과실은 특정 기업만의 결과가 아니라 반세기에 걸쳐 전 국민이 함께 쌓아온 산업 기반 위에서 나온 것인 만큼 그 과실의 일부를 전 국민에게 구조적으로 환원하는 게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이 교수는 “배당금이라는 표현으로 오해를 불러온 면은 있지만, 통화정책을 통한 경기 부양이나 소득 재분배가 어려운 상황에서 반도체 초과세수를 활용한 적극적 재정을 강조한 것”이라며 “기업의 돈을 빼앗는다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바이든 정부 당시 미국이 칩스법 등으로 첨단 산업 투자를 지원할 때 초과이윤이 나면 그 일부를 돌려받는 형태로 약정했는데, 이런 방식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성과급 논쟁은 주주의 이익을 절대시하는 ‘주주 자본주의’와 노동자, 협력업체, 소비자, 지역사회, 국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해 의사결정을 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점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 본부장은 “사회적 갈등으로만 볼 게 아니라 한국이 고유의 자본주의 모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을 촉발한 계기로 보고 다양한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