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해의 경제망원경](62) 튀르키예의 세속주의와 미완의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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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해의 경제망원경](62) 튀르키예의 세속주의와 미완의 기획

입력 2026.05.15 14:17

수정 2026.05.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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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중해 경제학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연합뉴스

2008년 가을 튀르키예를 방문했는데, 빌켄트대학교 총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그 대학 설립자가 필자를 만나고 싶어하는데, 시간을 낼 수 있는가 문의였다. 일정이 빠듯해 저녁에 가능하다고 하니, 관저에서 만찬을 제안했다.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에서 이흐산 도으라마즈(Ihsan Dogramac) 박사를 만났다.

도으라마즈 박사는 오스만 제국 시절인 1915년 현재의 이라크 에르빌에서 태어났다. 소아과 의사이자 교육자인 그는 이스탄불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선진 의료 시스템을 체득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빛나는 점은 교육과 보건의 결합이다.

하제테페대학교를 설립해 튀르키예 의학 교육의 표준을 세웠다. 1984년에는 튀르키예 최초의 사립 고등교육기관인 빌켄트대학교를 세워 연구 중심 대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국제적으로는 세계보건기구(WHO) 창설에 참여하며 유네스코(UNESCO)와 유니세프(UNICEF) 활동을 이어갔다. 2010년 95세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과학과 교육을 통해 국가 미래를 준비하고자 노력했다.

그날 만찬 분위기는 따뜻했다. 구순을 넘긴 도으라마즈 박사는 “전쟁으로 폐허였던 나라가 이제는 선진국이 되어 튀르키예에 정책 자문을 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한국전쟁 당시 튀르키예는 비영어권 국가 중 가장 먼저 파병을 결정했다. 전사자 숫자도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900여명의 희생을 치렀다. 그는 한국에 관한 추억을 회고하며 필자와 대화를 이어갔다.

“전쟁 속 교육으로 일어선 한국이 개혁 영감”

“백낙준 박사를 아시는가?”,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 없습니다”, “유네스코 활동으로 백 박사를 만나서 돌아가기 전까지 교류했는데, 양국의 교육제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한국은 민간 부문이 고등교육에 큰 몫을 담당했는데, 이것이 국가 발전의 초석이 됐지요.”

도으라마즈의 전기(<Children in His Heart, Youth on His Mind>)에는 백낙준 박사와의 교류를 귀중하게 서술한다. 도으라마즈 박사는 유네스코와 국제대학총장협회(IAUP) 활동을 통해 한국의 교육자 조지 백(George Paik·백낙준) 박사와 우정을 나눴다.

그는 백 박사로부터 한국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교육을 멈추지 않았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건물이 파괴되자 천막을 치고, 그마저 없으면 산비탈에 모여앉아 수업을 이어갔던 ‘노천학교(Open-air schools)’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보라, 자원도 땅도 없는 나라가 오직 인간의 머리(교육)에 투자하면서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 이것이 바로 튀르키예가 가야 할 길이다.”

1980년대 초 도으라마즈 박사는 학문적 정체에 빠진 대학을 쇄신하고자 고등교육위원회를 설립하고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는 행정 체계를 통합하고 연구 중심의 평가제도를 도입해 대학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었다. 1982년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비영리재단이 대학을 설립할 수 있다”는 근거를 명문화해 민간 자본이 교육에 이바지할 수 있는 법적 통로를 열었다. 1984년 설립된 튀르키예 최초의 재단 대학 빌켄트대학교는 도으라마즈 철학의 집약체였다. 영어 수업과 파격적인 장학금을 도입한 빌켄트는 튀르키예 고등 교육의 표준이 됐다.

한국전쟁 때 파병된 튀르키예 공군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 국가보훈처 제공

한국전쟁 때 파병된 튀르키예 공군 무자페르 에르된메즈 중위. 국가보훈처 제공

도으라마즈 박사는 “한국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교육으로 일어선 경험이 자신의 개혁에 결정적 영감이 됐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타튀르크로부터 이어진 근대화의 여정이 여전히 사회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미완의 기획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 회한을 드러냈다.

세계사에서 1453년을 역사가들은 ‘중세의 종말과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 그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동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오스만제국은 지중해와 발칸반도를 장악하며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오스만제국은 16세기 술레이만 대제 시절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유럽이 과학·산업 혁명으로 도약할 때 제국은 부패와 무역로 상실로 쇠퇴하며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 19세기 탄지마트 개혁조차 보수층의 반발과 민족주의로 분열을 가속했고, 제1차 세계대전 패배 후 제국은 무너졌다. 1922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독립 전쟁에서 승리했다.

세속주의, 생활 속 가치로 뿌리내리지 못해

아타튀르크는 제국의 폐허 위에 프랑스어 ‘라이시테’에서 유래한 ‘라익(Laik·세속주의)’을 핵심 가치로 삼아 ‘튀르키예 공화국’을 설계했다. 그는 신권 정치인 술탄·칼리프제를 폐지하고, 과학 중심의 학문 통합법을 통해 공교육의 기틀을 닦았다. 나아가 라틴문자 도입과 여성 참정권 부여 등 전방위적 서구화를 단행하며 현대적 시민의 정체성을 이식하고자 했다.

이러한 개혁은 튀르키예를 중동에서 독보적인 세속적 국민 국가로 재탄생시켰으나, 국가 주도의 강력한 하향식 라이시즘은 서구화된 엘리트와 내륙의 보수 대중 사이의 정서적 괴리를 낳았다. 이는 근대화 가치가 국민의 생활 세계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미완의 기획’이라는 한계로 이어졌다. 튀르키예의 라이시즘은 누군가에게는 ‘문명화’의 상징이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국가적 간섭’으로 인식되는 이중적 성격으로 정치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오늘날 튀르키예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 도구로 변질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2017년 국민투표를 통해 단행된 의원내각제 폐지와 대통령중심제로의 체제 전환은 그 결정적 계기였다. 찬성 51.4% 대 반대 48.6%라는 근소한 수치는 튀르키예 사회의 깊은 균열을 투영한다. 법치와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대도시 시민들의 저항은 강력한 지도자와 종교적 자긍심을 갈망한 아나톨리아 내륙 보수층의 선택에 밀려났다. 이는 아타튀르크가 천명한 세속주의 정체성인 ‘라익’이 국민의 생활 세계 속에 온전한 가치적 합의로 뿌리내리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현실은 도으라마즈 박사가 생전에 품었던 회한을 상기시킨다. 그날 만찬에서 여러 번 아타튀르크를 언급하던 그는 교육을 통해 근대화의 완성을 꿈꿨으나, 그것이 국민의 의식 속에 체화되지 못한 ‘미완의 기획’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2017년의 투표 결과는 박사의 우려대로, 국가 주도의 위로부터의 개혁이 사회 전반의 내면적 전환으로 승화되지 못할 때 어떠한 정치적 역행이 발생하는지 보여준다. 튀르키예는 형식적 근대화보다 가치적 통합이 얼마나 험난한 과제인지를 일깨워주는 뼈아픈 반면교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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