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생성한 ‘K-문샷’ 이미지. 김우재 제공
초파리를 다루는 유전학자에게 실험실은 하나의 우주다. 성공한 실험은 아름답고, 실패한 실험은 더 아름답다. 실패 속에 다음 질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한국의 연구 현장을 돌아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땅의 과학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시스템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정부가 ‘K-문샷’을 선언했다. AI 3대 강국 도약, 12대 국가 난제 해결, 신약 개발 주기 10분의 1 단축. 구호는 장엄하다. 그런데 나는 이 장엄한 구호가 불안하다.
DARPA 혁신 모델의 정수: 엘리트 유목민과 권한의 디테일
혁신은 슬로건에서 오지 않는다. 혁신은 구조에서 온다.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60년 넘게 인터넷, GPS, 스텔스 기술, 음성인식을 잇달아 만들어낸 것은 예산이 많아서도, 구호가 거창해서도 아니었다. DARPA의 핵심은 놀랍도록 단순한 원칙 하나에 있다. 최고의 전문가에게 전권을 주고, 관료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다는 것. DARPA의 프로그램 매니저(PM)는 과제를 ‘관리’하는 행정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술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기관에 뛰어드는 엘리트 유목민이다. 임기는 통상 2년으로 시작해 최장 4~5년으로 연장될 수 있다. 짧다. 그러나 이 짧음이 기적을 만든다.
DARPA PM의 임기가 짧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 장치다. 그들은 달력의 숫자를 지워가며 일한다. 임기 안에 세상을 바꿀 성과를 내지 못하면 흔적도 없이 현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임기 연장을 위해 관료 조직에 잘 보일 이유가 없고, 차기 보직을 위해 정치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이 제안한 프로그램의 기술적 성공만이 그들의 이름을 역사에 남긴다. 미 의회 보고서는 DARPA의 성공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신뢰와 자율성, 짧은 임기가 만드는 절박감, 사명감 그리고 실패에 대한 관용. 이 넷은 독립적이지 않다.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PM이 기획한 프로젝트는 ‘하일마이어 카테키즘’이라는 8개의 날카로운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무엇을 하려는가. 지금의 한계는 무엇인가. 당신의 방식이 새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이것을 원하는가. 비용은 얼마이며 성공은 어떻게 측정하는가. 이 질문들이 기획의 뼈대를 잡은 뒤, 통과된 프로젝트는 PM의 주도 아래 외부 간섭 없이 진행된다. PM은 예산 배분은 물론 성과가 미진한 과제를 즉시 중단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이 ‘킬 스위치’가 DARPA 혁신 생태계의 숨은 엔진이다. 돈을 계속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제때 끊어낼 수 있는 판단력이 자원을 올바르게 배분한다. PM의 이런 독립적 판단을 행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SETA(과학·공학·기술 지원 조직)와 CMO(계약 관리 사무소)다. PM은 이 모든 지원 위에서 오직 기술에만 집중할 수 있다.
한국형 PM 제도의 구조적 결함: 관료주의의 대리인화
왜 전문가 중심의 PM이 필요하고, 왜 그를 관료주의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필수적인가. 답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이다. 혁신은 기생충이 아니라 바이러스처럼 작동한다. 기생충은 숙주를 서서히 착취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의 기계를 빠르게 장악해 복제한다. 관료주의는 기생충이다. 모든 혁신적 아이디어를 서서히 평범하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시스템은 유지된다. 전문가 PM이란 세포 안에 뛰어드는 바이러스처럼, 기존 시스템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것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가 관료 조직 안에 포획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바이러스가 아니다. 그는 또 하나의 기생충이 된다.
한국의 PM 시스템은 이 포획의 역사다. 정부는 DARPA를 벤치마킹하겠다며 ‘국가특임연구원’이나 ‘임무 중심 PD’ 같은 명칭을 도입하고 있지만, 이들의 신분은 법적 근거가 모호한 특수 계약직에 머물러 있다. 신분이 불안정한 PM은 관료 조직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과감한 혁신보다 안전한 관리로 이어진다. 더 심각한 것은 관료들과의 유착을 통해 10년 넘게 자리를 지키는 ‘장수 PM’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임기제의 취지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들은 자기 전문 분야와 무관한 행정 업무까지 떠안으며 부처의 예산 확보를 돕는 충실한 대리인이 된다. DARPA PM이 달력의 숫자를 지워가며 절박하게 일할 때, 한국의 장수 PM은 생존을 위해 관료의 눈치를 살핀다. 이 절박감의 부재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K-문샷 프로젝트: 선언적 환상과 탁상행정의 산물
그런 배경에서 K-문샷을 보면 실망을 넘어 허탈해진다. 20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이 투입되는 신약 개발 미션의 총괄 PD를 ‘1년 임기의 비상근’으로 모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사업의 설계자들이 DARPA를 진심으로 벤치마킹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본업을 따로 둔 채 일주일에 하루 이틀 출근하는 비상근 PD가 타 부처의 규제 장벽을 허물고, 수천억원의 예산을 책임지며, 파괴적 기술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한가. DARPA PM이 연방 공무원 수준의 신분 보장과 전결권을 가진 전임 전문가라는 사실과 이 설계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게다가 K-문샷이 내세운 ‘신약 개발 주기 10배 단축’이라는 목표는 제약업계로부터 탁상행정의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AI가 후보 물질 발굴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 개발 주기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임상시험은 인간의 몸이 요구하는 생물학적 절대 시간이다. 그 시간을 AI가 단축하겠다는 선언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 수사에 가깝다.
한국에서 ‘DARPA형 혁신’을 시도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형 DARPA, 임무 중심 연구, 도전형 R&D, 국가 난제 해결 프로그램. 명칭은 바뀌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비슷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언제나 비슷했다. 첫째, 전문가는 소환되지만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다. 화려한 직함을 달고 등장한 전문가들은 결국 관료 조직의 기획을 합리화하는 ‘장식 전문가’로 소비된다. 둘째, 혁신 기구는 예외 없이 정치적 자산으로 흡수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혁신의 컨트롤타워가 교체되고, 그 자리를 거쳐간 인물들은 충분한 경력을 쌓은 뒤 각자의 다음 행선지로 흩어진다. 셋째, 실패는 학습되지 않는다. 한 사업이 흐지부지 끝나도 다음 정부는 전임 정부의 시행착오를 복기하지 않고 새로운 이름의 사업을 다시 선언한다.
K-문샷이 이 계보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증거는 아직 아무 데도 없다. 달을 향해 쏜 것이 화살이 아니라 불꽃놀이였다는 사실을, 이 땅의 과학자들은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