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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울 만리동 콜링 유, ‘만유인력’

입력 2026.04.10 14:44

수정 2026.04.1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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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요한 문화연구자
동네책방 ‘만유인력’. 허요한 제공

동네책방 ‘만유인력’. 허요한 제공

“한쪽은 너무 늦었고, 한쪽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 서광식·서기웅 부자 시집 <만리동 고개를 넘어가는 낙타>(2011)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집에서 서울 만리동 고개는 이따금 미싱 소리만 들려오는 사막의 모래언덕으로 그려지고, 그곳에 사는 가족은 꿈속에서 에프킬라를 두려워하며 쫓기는 바퀴벌레가 되기도 한다. 만리동 마을 곳곳에 재개발 플래카드가 걸리고 ‘철거’ 알림장이 돌던 시절의 기억이다. 서울의 여느 재개발 구역처럼 만리동과 아현동은 도심 내부의 주변 지역으로서 급격한 변화만큼이나 상처의 서사도 있는 동네다.

서울지하철 충정로역 6번 출구에서 300여m를 걸어가면 손기정체육공원으로 연결되는 언덕길이 나온다.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만리동2가와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아현뉴타운을 배경으로 한 손기정로에는 재개발 준비위원회 걸개를 건 사랑방을 비롯해 공인중개사무소, 작은 슈퍼, 가내수공업 형태의 봉제공장들이 눈에 띈다. 전장석 시인은 “막대그래프 같은 아파트와 낮은 곡선의 지붕들”(‘만리동 책방 만유인력’) 속에서 사람을 끌어당기는 책방 ‘만유인력’을 발견한다. 언덕의 끝자락에 있는 만유인력은 낡은 풍경 속에 알록달록한 빛깔을 띠며 낯설고도 다정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역 책방 운동의 두 방향: 중력과 인력

만유인력이 지역 책방으로 자리 잡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다수의 마을 주민은 20여 년 만에 생긴 책방에도 시큰둥했고, 한 주민은 술에 취해 책방에 들어와 이 동네는 ‘꼬방동네’가 아니라 ‘돈만 아는 놈들’이 사는 곳이라며 책방같이 허황한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책방의 책을 노트북 받침대로 쓰며 온종일 작업만 하는 카공족도 있었고, 책방을 좋아했던 한 홈리스 분은 주민들의 민원신고 때문에 쫓겨나기도 했다고 한다. 책방지기들은 봉래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함께 봉래전자음악단을 만들고 성황리에 학예회 공연도 했지만, 구심점 역할을 했던 학부모가 이사하는 바람에 활동이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도 동원슈퍼 올리브 언니는 지금까지도 책방의 든든한 팬이다. 북적대지 않는 책방의 책방지기들은 방명록에 남긴 아기자기한 글들과 누군가 왔다 간 흔적으로 방문객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렇게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책방은 9년의 세월만큼 만리동에 뿌리내리고 있다.

서울도서관 지원사업 ‘타이니 북숍 라이브’에 참여한 사람들. 허요한 제공

서울도서관 지원사업 ‘타이니 북숍 라이브’에 참여한 사람들. 허요한 제공

또한 이 작은 책방은 사람들을 모으고, 다시 사람들을 향해 뻗어 나가며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크라우드펀딩 자금으로 시작된 만유인력은 책방에서 다채로운 문화행사를 열며 예술활동가들과 협업해왔다. 자립 음악회, 글쓰기 워크숍, 독서 모임, 만리우드 영화제, 동네 라디오 <만리동 콜링 유>, 다원예술실험극 <22空18欲.福島(복섬)-지구> 공연, 플리마켓, 기계식 키보드 전시회, 사진전 <인간인력 / 人間引力>, 독립출판작가 사인회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의 예술활동가들이 만유인력을 저마다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만유인력의 문화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만리동과 아현동 지역을 넘어 먼 발걸음을 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 책 구독 시스템을 조성했다. 한 달에 한 번 책방지기가 추천하는 책 한권과 편지 그리고 편지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음악을 구독자들에게 배달하는 방식이다. 이는 책방에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이들을 만유인력과 연결하는 통로다.

책방 자체 프로그램과 함께 지역 공공기관과의 프로젝트 협업도 활발하다. 마포평생학습관과 함께한 라이트노벨 1인 낭독극을 비롯해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활동한 마포문화재단과 만유인력 콜센터, 마포문화재단 지원사업 ‘드림스티치’, 서울도서관 지원사업 ‘타이니 북숍 라이브’ 등 지역의 공공사업 확산에도 기여하고 있다.

만유인력 언덕길: 대항문화의 공유지

책방지기인 시인 김연희는 만유인력이 공유지 같은 공간이 되길 바라고 있다. 최근에는 공동체은행 빈고의 김지음이 쓴 <자본의 바깥>(2025)을 읽고 만유인력이 커먼즈(commons) 운동에서 출발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책방에 손님이 아닌 ‘주인들’이 모여들어 자유롭게 음악을 듣고, 상상하고,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졸리면 엎어져 잘 수도 있는 그런 공간을 꿈꾼다. 책방지기인 민중 엔터테이너 한받은 자립과 투쟁 현장 연대의 의미를 지닌 ‘구루부 구루마’의 행보를 이어, 24시간 활동하는 책방을 꿈꾸었다. 한받에게 자립이란 자본주의 상품화 논리에 예속된 주체가 스스로를 인식하고 참된 자유를 지향하는 실천이다. 자립 음악에 대한 그의 끝없는 탐구는 책방 공간을 통해 자립 문화 운동으로 확장되고 있다.

만유인력에는 오늘날 ‘사람 잡아먹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꿈꾸는 이들이 ‘돈만 아는 저질’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 모이곤 한다. 책방에서는 <동아시아 민중, 인디, 자립음악과 혁명 토론회>, <자립 음악회>, <충분한 삶 가꾸기 워크숍>, <내란수괴 탄핵 기원 음악회>, 지혜복 교사 연대 공연 <만유인력의 법칙 621조: 진실은 반드시 A학교로 돌아간다> 등 다수의 대항문화 활동이 펼쳐졌다. 또한 책방은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923 기후정의 행진’, ‘동아시아 불복종 지도’,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탈시설-자립생활 권리보장’ 등 다양한 사회적 의제에 연대하는 포스터를 출입문에 내걸며 거리의 시민들에게 저항의 메시지를 발신해왔다.

재개발이 완료된 아파트단지와 재개발이 예정된 동네, 이 엇갈린 시간의 축이 공간화된 언덕길을 올라 책방으로 향하다 보면, 제프리 팰컨 주연의 컬트영화 <6현의 사무라이> 속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환상의 유토피아 ‘로스트 베가스’로 가는 길 말이다. 사막에서 수많은 ‘로큰롤 전투’를 목격하고, 쓰러진 사부의 기타를 멘 채 유토피아로 향하는 소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년은 갖은 음악적 교류와 투쟁이 이어졌던 사막에서 로큰롤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았다. 공공재개발구역으로 선정된 아현 1구역은 이미 새 삶이 정해진 껍데기만 남은 동네는 아니다. 그 속에는 재개발 서사 못지않은 다채로운 삶의 결이 있으며, 발효되고 있는 문화가 있다. 책방 만유인력은 서울 한복판에 존재하는 반자본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끌려 들어갔으면 한다. 잊지 못할 멋진 경험이 될 테니까.

“당신 앞에서 나는 정말 사라지지는 않을 거야. 영원을 향해 날아가리. 라, 만리동 콜링 유.”(만유인력 동네 라디오 방송 로고송 ‘만리동 콜링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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