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플래시 이미지
우리는 한때 기술이 인간을 노동의 굴레에서 해방할 것이라 믿었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경제 발전으로 2030년경이면 주 15시간 노동의 시대가 올 것이라 예언했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실리콘밸리는 워라밸과 휴가 제도를 자랑하며 인재를 유치했다. 그러나 2026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풍경은 정반대다. AI라는 초고속 열차에 올라탄 테크 업계는 오히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인간을 책상 앞에 묶어두고 있다.
중국 테크 기업에서 발원한 과로 문화 996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근무하는 총 72시간의 살인적인 노동 스케줄이다. 그런데 최근 실리콘밸리 AI 스타트업들 사이에 996과 유사한 ‘하드코어(Hardcore)’ 과로 문화가 번지고 있다.
AI 모델의 업데이트 주기가 주 단위, 심지어 일 단위로 짧아지면서 어떤 엔지니어는 “주말에 이틀 쉬면 월요일 아침에 세상이 바뀌어 있다”고 얘기한다.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엔지니어들은 스스로를 996, 혹은 그 이상의 일정 속으로 밀어넣고 있다. 심지어 어떤 곳은 사무실에 침대를 들여놓고 ‘0-0-2(자정부터 자정까지 일하고 주말에 2시간 쉰다)’라는 농담 섞인 비극을 현실로 구현하고 있다.
이 현상의 배후에는 공포와 탐욕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벤처 캐피털들은 이제 비전이나 철학 대신 “팀원들이 얼마나 갈려 나갈 준비가 돼 있는가”를 묻는다. 투자자들은 사무실 불이 꺼지지 않는 팀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창업자들은 그 자금을 연료 삼아 팀원들을 더욱 거칠게 몰아붙인다. 과거 구글이나 메타가 누렸던 여유로운 혁신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누가 더 빨리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누가 더 먼저 모델을 배포하느냐는 속도전의 시대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든 AI가 그 창조주들을 가장 먼저 소모품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중국에서 996은 규정 위반으로 공표됐고,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이를 미국적 가치와 결합해 승리하기 위한 희생으로 포장한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중국의 996 문화를 언급하며 경쟁자들의 무서운 속도를 경고했고,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은 워라밸을 챙기다가는 AI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 일갈했다가 많은 비판을 받은 후 발언을 철회하기도 했다.
이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첨예하게 갈린다. 낙관론자들은 이것을 기술 전환기의 불가피한 마찰로 읽는다. 모든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은 그 초입에 극단적인 과잉을 수반했고, 시장과 기업은 결국 자정 능력을 발휘해왔다는 것이다. 996은 AI 전환의 임시 연료이지, 항구적인 운영 체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비관론자들은 이번엔 다르다고 주장한다. AI의 경쟁 주기는 인터넷 시대와 달리 인간의 학습 속도를 구조적으로 초과한다.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가 상시화될 때, 과로는 예외 상태가 아니라 작동 조건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그 조건 아래 설계된 AI는 설계자들의 피로와 편향과 공포를 고스란히 흡수한다는 주장이다.
역사는 항상 낙관론자와 비관론자의 논쟁 속에서 전진했다. 이 순간에도 우리의 선택은 조용히, 그러나 돌이키기 어렵게 쌓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