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9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기소된 윤 전 대통령의 1심 선고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문재원 기자
최근 스웨덴 예테보리대학 산하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V-Dem)가 발표한 ‘민주주의 보고서 2026’에 따르면,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 종합순위는 2024년 41위에서 2025년 22위로 크게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179개국을 대상으로 한 이 보고서는 정치 체제를 크게 민주주의와 전제주의(또는 독재)로 구분하고, 민주주의 체제는 다시 자유민주주의와 선거민주주의로 세분화한다. 이중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높은 단계로 평가한다. 한국은 계엄령 사태로 인한 혼란으로 자유민주주의 그룹에서 일시적으로 탈락했다가, 2025년에 다시 회복하며 최고 등급을 되찾았다.
모두가 기억하듯 한국의 계엄령 사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결정이 시발점이었다. 이는 정치 지도자 한 명의 잘못된 판단이 민주주의에 미칠 수 있는 심각한 부정적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현재 진행 중인 이란 전쟁 역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주도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그동안 거의 항상 자유민주주의 그룹으로 분류됐지만, 이번 보고서에서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지수에서 세계 51위로 급락했다. 보고서는 미국의 민주주의 상황을 “1965년 이후 최악”으로 평가하며 심층 분석을 담았다.
민주주의 퇴행서 보여준 체제의 불안정성
한국의 계엄령 사태와 미국 트럼프 2기에서의 민주주의 후퇴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최고 지도자의 결정이 직접적인 촉발 요인이었으며,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강력한 지도자의 독재적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공화정(오늘날 민주주의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주요 장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공화정의 미덕은 ‘최선의 정책’을 선택하는 데 있지 않고, ‘최악의 재앙적 정책’을 피하는 데 있다.” 반대로 군주정은 뛰어난 정책을 내놓을 가능성은 다분하지만, 동시에 재앙적 정책을 선택할 위험도 크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공화정을 군주정보다 우월한 체제로 평가했다. 그런데 직전의 한국, 그리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미국, 헝가리, 이탈리아 등 여러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민주주의 퇴행은 민주주의 체제의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지난해 2월 11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행정명령 서명을 마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옆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아들과 함께 서 있다. 당시 머스크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었다. AFP연합뉴스
정치 지도자의 행위를 ‘권력 유지’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현대 정치경제학의 ‘선택자 이론(Selectorate Theory)’은 모든 정치 체제를 지도자의 권력 유지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이 이론의 핵심 전제는 간단하다. 모든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며, 정책·이념·국익은 모두 이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이론은 사회를 지도자, 선택자(선출권자), 승리연합이라는 세 집단으로 나눈다. 지도자는 제한된 자원을 배분하며 지지 기반을 관리한다. 선택자는 지도자를 선택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 잠재적 집단으로, 민주주의에서는 거의 모든 성인 시민이 포함되지만, 독재에서는 소수 엘리트만 해당한다. 승리연합은 지도자가 실제로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 지지자 집단이다.
지도자는 자원을 배분할 때 사적 재화(특혜·관직·뇌물 등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와 공공 재화(교육·의료·인프라·경제 성장 등 모두가 누리는 것) 사이에서 선택한다. 승리연합이 작을수록(독재 체제) 지도자는 사적 재화를 핵심 지지자에게 집중적으로 제공한다. 반대로 승리연합이 클수록(민주주의 체제) 공공 재화 제공이 정치적으로 더 효과적이다.
트럼프 현상 역시 이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2024년 재선 당시 트럼프는 다양하고 넓은 연합을 구축했으나 2026년 3월 현재 내부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비영리 연구기관 모어인커먼(More in Common)의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다음과 같은 4개 유형으로 나뉜다.
①강경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그룹: 가장 충성도가 높으며 트럼프의 실질적 핵심 승리연합(약 30%) ②반-진보(anti-Woke) 보수: 비교적 고소득·고학력 백인 보수층(약 20%) ③전통 공화당원: 중도적 실용 보수로 트럼프를 전략적으로 지지(약 30%) ④마지못해 지지하거나 새로 유입된 그룹: 히스패닉 남성, 일부 흑인 남성 등으로 현재 가장 빠르게 이탈 조짐을 보이는 불안정한 그룹(약 20%).
이 조사 결과는 트럼프 지지층이 다양하다는 점과 함께 핵심 지지그룹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선택자 이론에서 승리연합에 해당하는 핵심 지지자들은 마가 강경파와 특정 기부자·산업 집단으로 구성된다.
지난 3월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반대하는 ‘노 킹스(No Kings)’ 시위 참가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AP연합뉴스
민주주의는 지켜가며 다듬어야
2025년 들어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확대, 강경 이민정책, 행정권 강화, 연방 정부 개편 등을 적극 추진했다. 이는 자신의 승리연합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제공하면서 광범위한 유권자에게 ‘강한 미국’이라는 이미지를 주는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2026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내부의 균열이 커지고 있으며 법원, 주 정부, 의회 등 제도적 제약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미국은 삼권분립, 연방제, 독립 언론 등 강력한 제도적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승리연합의 규모가 본질적으로 매우 커서 트럼프가 원하는 ‘작은 승리연합에 기반한 독재 스타일’의 운영은 구조적으로 어렵다.
하상응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발간하는 ‘글로벌 이슈 브리프’(2026년 3월호)에서 트럼프 리더십의 균열 가능성과 마가 세력의 분화를 지적했다. 하 교수는 트럼프가 대통령직을 사익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그의 초헌법적 행보가 연방법원의 제재를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이란 침공으로 인한 반전 여론, 반유대주의 논란으로 인한 내우 갈등, 인공지능(AI) 지원 정책에 따른 일자리 위협 등이 트럼프 지지층의 이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독재적 지도자가 반드시 걸러질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의 계엄령 사태와 미국 트럼프 2기의 사례는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도 최고 지도자의 개인적 선택과 권력 유지 전략이 체제를 얼마나 취약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민주주의는 완전한 제도가 아니다. 우리가 지켜가며 다듬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