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튤립>, 뮤지컬 <긴긴밤>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이름을 기억해내고 서로를 호명하며 본질을 찾은 인간 소녀 치히로(센)와 재개발로 사라진 강 코하쿠누시(하쿠). TOHO Theatrical Dept 제공
어떤 아이는 이름을 빼앗긴 채 신들의 목욕탕에서 일한다. 어떤 아이는 꽃의 이름으로 불리며 자신의 혈통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끝내 이름 없이 바다로 향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 세 장면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언제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가.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튤립>, 뮤지컬 <긴긴밤>은 전혀 다른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름에 대해 호명과 명명(Naming)의 간극에 대해 사유하게 이끈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세계가 한 존재를 특정한 자리로 불러내는 방식이며, 동시에 한 존재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호명’도 그 결이 층층이 나뉜다. ‘진심 어린 호명(Calling)’이 있는가 하면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가 정의한 것처럼 주체를 시스템의 틀 안에 가두는 ‘권력 행위로서의 호명(Interpellation)’도 존재한다. 이 세 작품은 바로 그 억압적 명명과 구원적 호명 사이 경계에서 전개된다.
연극 <튤립>은 러·일 전쟁 조선인 노동자의 갓난아기를 납치한 일본 장교의 명명에 가려져 부자임을 망각해야 했던 쥬리프와 쿠로의 비극적 가족사를 다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이름을 잃은 존재와 이름을 바꾼 권력
유명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고스란히 무대의 언어로 옮겨다 놓은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미야자키 하야오 원작, 존 케어드 번안·연출, 이마이 마오코 공동 번안, 히사이시 조 오리지널 스코어, 존 보우서 무대, 토비 올리에 퍼펫 디자인·연출, 이데 시게히로 안무, 카츠시바 지로 조명)에서 평범한 소녀 치히로는 억지로 이름을 바꿔야 했다. 얼결에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 마녀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온천 노동자 ‘센’으로 살아간다. 이름을 잊는 순간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규칙이 있는 이 판타지 세계에서 유바바의 ‘명명’은 노동 계약서이자 기억을 지우는 장치다.
비근한 예가 수많은 약재를 섞어 온천물을 데우는 가마 할아범의 화구에서 석탄을 나르는 검댕들이다. 이름조차 없는 그들은 단지 석탄을 나르는 노동력일 뿐이다. 검은 먼지처럼 무대 위를 오가는 그들의 움직임은 아직 호명되지 않은 기계적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퍼펫티어(인형술사)들이 조종하는 작은 검은 뭉치들은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노동의 리듬을 만든다.
치히로는 유바바의 부하지만 처음부터 돌봐주려고 애썼던 하쿠의 경고를 되새기며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는다. 유바바의 악행을 돕긴 하지만 하쿠는 센이 어린 시절 강에 빠졌을 때 구해준 재개발지역 강의 신이다. 치히로가 하쿠의 본질 코하쿠누시강을 기억해 호명하는 순간 용으로 변해 창공을 가르는 장면은 이 작품의 절정. 배우들의 날렵함과 퍼펫티어들의 일사불란한 군무로 해방감의 극치를 구현했다. 예닐곱 명 퍼펫티어의 속도감에 동기화된 라이브 오케스트라의 에너지 덕이기도 하다.
반면 연극 <튤립>(김도영 희곡, 전인철 연출, 전강희 드라마터그, 박상봉 무대, 최보윤 조명, 김시율 음악, 김지연 의상, 장경숙 분장, 지경민 안무, 창작산실)에서 ‘이름’은 허공을 부유한다. 일제강점기,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권력을 과시한 명명이 본질을 잠식해버린 탓이다.
러·일 전쟁(1904~1905)기 연해주 튤립 군락에서 태어난 조선인 아기에게 일본 장교 야마토(김정호 분)는 튤립의 일본식 발음인 ‘쥬리프’(김하람 분)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를 낳은 조선인 노동자 막산(권정훈 분)은 아내 복종과 아들을 찾기 위해 튤립밭을 다 뒤졌으나 아내의 시신만 발견한다. 일본 군수물자를 나르는 용역에 동원돼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 굳어져 검은 얼룩 얼굴이 돼 ‘조선 까마귀’ 혹은 ‘쿠로’라 불리며 야마토에게 빼앗긴 아들을 추적해온 막산. 결국 야마토를 찾아내고 반 협박하듯 도쿄대 다니는 아들 옆에서 2년을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야마토에 의해 명명된 ‘나카무라 쿠로’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존재하며. 야마토의 아내 에리코(황순미 분)는 아들이 흉측해 보이는 막산에게 끌리는 게 싫다.
이 연극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은 쥬리프와 막산이 흡수되듯 서로를 꼭 끌어안고 짓뭉개진 꽃밭 위를 뒹굴며 오열하는 장면이다. 친부인지 모르면서 그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쥬리프의 본능적인 끌림과 친부의 깊은 슬픔이 꽃향기와 호지차 향기, 흙의 질감과 통증 등 오감으로 확장되는 이 장면에서 객석은 조용히 들썩인다. 이름이 가려진 채 살아가는 존재의 비극으로 극장 전체가 균열하는 듯해서이다.
뮤지컬 <긴긴밤>은 아기 펭귄을 본질적 시공간인 바다로 보내 스스로 살아가도록 돌본, 세상에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이야기를 다룬다.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
호명되지 않는 호명의 무한한 가능성
뮤지컬 <긴긴밤>(루리 원작, 양소영 작·작사, 박보윤 작곡, 황희원 연출, 이경구 안무, 이철 무대, 임재덕 조명, 권지휘 음향)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름을 이야기한다. 어린 펭귄(최주은·설가은·최은영·임하윤 분)은 이름이 없다. 그냥 펭귄이다. 이 작품에서 이름이 있다는 것은 동물원에 갇힌 경험이 있다는 의미다. 이름은 자유의 증표가 아니라 관리의 표식이다. 그래서 펭귄의 아빠들은 이름이 있다. 알이었을 때 품어서 지켜준 펭귄 치쿠(유동훈·이규학 분)와 윔보(박근식·도유현 분), 그리고 바다에 데려다주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흰바위코뿔소 노든(홍우진·강정우·이형훈 분)이다.
치쿠와 윔보는 펭귄알을 지키다 목숨을 잃고, 노든은 펭귄을 바다로 데려가기 위해 긴 여정을 함께한다. 노든 역시 어릴 때 펭귄처럼 긴 정체성의 여정을 거친 바 있다. 그는 코끼리 무리 속에서 자라났고, 동물원에서 같은 코뿔소 앙가부(박근식·도유현 분)를 만나 비로소 자신의 종을 인식한다. 전쟁과 밀렵으로 가족을 잃고 긴긴밤을 통과하던 중 아기 펭귄의 아빠가 됐다.
바다를 향한 긴 여정, 마지막 갈림길에서 노든과 펭귄은 서로에게 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호칭을 선물한다. 코뿔소 노든에게 주어진 ‘위대한 펭귄’과 펭귄에게 주어진 ‘위대한 코뿔소’는 그들의 연대와 이해를 상징하는 진정한 호명이다. 펭귄은 끝내 이름을 갖지 않은 채 바다로 향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그는 가능성의 존재로 열린 결말을 당당하게 맞이한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수백개 바다색 공 사이에서. 이 작품의 백미인 마지막 장면처럼 바다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고, 언젠가 자신을 부를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호명’될 때 비로소 주체가 된다고 했다. 누군가 “거기, 너!”라고 부르는 순간 그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가 바로 사회적 주체라는 것이다. 이름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세계가 한 존재를 특정한 위치로 불러 세우는 장치다. 그러나 그 이름이 언제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름은 권력에 의해 빼앗기고, 어떤 이름은 역사 속에서 왜곡되며, 어떤 이름은 아직 불리지 않은 채 미래를 기다린다. 유바바의 온천장에서 노동력만으로 존재했을 때도, 꽃으로 이름 지어지며 본질을 망각한 채 살아간 일제강점기에도, 그리고 척박한 긴긴밤의 여정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한 것은 결국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튤립>은 막을 내렸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3월 2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긴긴밤>은 29일까지 대학로 링크아트센터드림 1관에서 상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