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의 한 동네 골목에 자리한 학수네 책방. 이소영 제공
나의 어린 시절에 서점이란 이마트였다. 경상북도 최북단 봉화군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는 우리 마을에는 서점이 없었다. 일상에서 접하는 책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는 학교도서관이 전부였다. 화요일이면 재밌고 다양한 책이 많이 실린 봉화군 도립도서관 버스가 왔지만, 초등학생이 하교하는 시간보다 훨씬 전에 떠났기에 방학에만 도서관 버스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중학생이 된 즈음에는 이용자가 적다는 이유로 우리 마을을 영영 떠났다. 도서관 담당자가 버스 애용자였던 아버지의 딸인 나를 알아보고, 아버지가 읽을 만한 새로운 무협소설을 추천해줄 때의 기쁨과 뿌듯함을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돼버렸다.
이런 형편이니 나와 우리 마을 아이들은 읽고 싶은 책을 직접 골라 제 손으로 사본 경험이 극히 드물었다. 어머니가 근처 도시의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동안 베스트셀러와 아동학습만화 위주로 전시된 도서 코너를 재빨리 훑어보는 게 서점에 가는 것이었다. 장난감 코너도 들러야 했기 때문에 책을 찬찬히 살펴볼 시간은 늘 부족했고, 화려한 표지의 만화책 위주로 손이 가는 건 당연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2026년 봉화군에는 서점이 없다. 일상에 서점이 없었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서점에 자주 발걸음할 수 있을까. 동네책방을 마주치면 종종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곰탕 같은 책방, 학수네
경북 안동시에 있는 ‘학수네 책방’은 영가초등학교 옆에 있다. 학생들이 하굣길에 들르거나 현장체험학습으로 방문하곤 하는 이 책방은 원래 곰탕집이었다.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면 곰탕을 만들었던 곰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곰터에서는 종종 솜씨 좋은 마을 주민들의 수공예품과 직접 만든 김밥 등의 음식을 파는 작은 장이 열리기도 했다. 지금은 책을 사지 않아도 손님들이 부담 없이 책방에 머물 수 있도록 커피 머신을 들이려고 보수 중이다.
한옥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책방의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그림책이 보면대에 놓여 있는 갈색 피아노와 고전 서적이 꽂힌 책장이 보인다. 그 방을 중심으로 양옆에 또 다른 방이 있다. 방마다 책의 종류가 다르다. 왼쪽 방은 청소년 도서와 문학 등이 주이고, 오른쪽 방은 모임을 할 수 있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모임방이다. 다락방으로 올라가면 전통가구와 방석 그리고 그림책이 모여 있다. 책방지기의 방도 있는데, 북스테이를 통해 이곳에 묵을 수도 있다. 벽면 여기저기에는 방문한 손님들이 필사한 종이와 아이들의 그림이 붙어 있고, 한옥 특유의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책을 고르며 여러 방을 둘러보던 중 서랍장 위에 쌓여 있는 책 네 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비치 도서 외 주문구매 가능하다는 메모가 있었다. 클릭 몇 번이면 다음 날 바로 책이 도착하는 온라인 서점이 익숙한 시대에, 동네책방에 일부러 책을 주문하는 풍경이 낯설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손님이 책방에 주문한 책들. 이소영 제공
유자차 한잔을 주문해 나무 테이블에 앉아 책방지기의 이야기를 들었다. 책방지기는 곰탕 일을 정리한 뒤, 오래 미뤄두었던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책모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은 어느덧 4년째 이어지고 있고, 함께 책을 읽던 모임회원들의 제안으로 책방을 연 게 ‘학수네 책방’이다.
책방에 청소년들도 자주 오냐는 내 질문에 책방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의 요청으로 진행한 그림책 수업이나 책방 현장체험을 통해 아이들을 만났고, 아이들도 골목 안에 있어 미처 알지 못했던 책방의 존재를 알게 됐다. 아이들 하교 시간이면 “학수네 책방이다!”라는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지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잠깐 들어와 놀다가는 학생들도 있다. 어른들의 후원으로 청소년들에게 책을 선물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청소년 독자들도 자주 방문한다. 학교와의 연계는 책방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자, 아이들과 책을 잇는 다리다.
주민들을 위한 북콘서트도 진행하고 있다. 첫 번째 행사는 단골의 추천으로 음악가를 섭외해 소규모 음악회로 시작했고, 최근에는 ‘브로콜리너마저’의 덕원을 초청해 노래하고 책 이야기를 했다. 이런 특별한 이벤트뿐만 아니라 매달 2회 운영하는 책모임 ‘슬공’(슬픔이의 공감)도 있다. 공동의 책과 각자의 책을 공유하고 때로는 필사와 낭독도 함께한다. 학수네 책방은 방문객의 60%를 차지하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사랑방이자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 책방을 운영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다. 안동도서관에서 학수네 책방에 5000권의 책을 기증했다는 소식이나, 지역서점에서 구입한 책을 읽고 도서관에 반납하면 구입금액의 70%를 돌려준다는 이벤트에 대한 기사도 보았다. 그러나 책방의 지속을 위해서는 도서관과 서점이 보다 지속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공공도서관이 지역 서점을 통해 책을 구입하는 제도가 존재하지만, 동네책방이 서점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건이 까다로워 실제로 혜택을 받기는 쉽지 않다. 동네책방 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서점들에 직접 방문해 살펴보며 어떤 지원이 책방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지속하게 할지 고민해야 한다.
책방을 찾는 손님들도 지기에게 “오래 운영해달라”고 거듭 부탁한다. 자신이 사는 거리에 서점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서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고 이야기한다. 책을 팔아야 공간이 지속한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고 싶은 책을 책방에 주문하기도 한다. 서점이 있어야 한다는 마음, 그 마음들이 모여 학수네 책방을 존재할 수 있게 했다.
책방이 있는 일상
나의 어린 시절에도 학수네 책방 같은 공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굣길에 들러 아무 책이나 펼쳐볼 수 있는 장소, 타인의 취향으로 선별된 책장을 살펴보며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공간, 북토크나 책모임이 일상에 있었다면. 독서라는 취미가 혼자만의 것이 아닌 친구와 함께할 수도 있는 일이란 것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을까. 아이들 또한 책을 고르는 감각을 익히고, 판매실적 위주의 온라인 서점 큐레이션이 아닌 누군가의 말을 듣고 계획에 없던 책을 집어 들어보기도 했을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각종 문화 프로그램을 누리고, 책을 매개로 서로 새로이 연결되는 경험도 해봤을 테다. 또한 서점에 방문하는 외부인과 마을이 이어지기도 했을 것이고. 이렇게 서점은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독서의 문턱을 낮추는 훈련장이자 주민들을 위한 사교장이 됐을 것이다.
봉화군에 여전히 서점이 없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근방의 도시에 학수네 책방 같은 공간이 존재하는 한 아이들이 서점과 친숙해질 기회는 늘 열려 있다. 동네책방, 특히 지역의 서점들이 오래 존속해야 하는 이유다. 학수네 책방과 여러 동네책방에 수많은 아이가 드나들기를, 지역에서도 동네책방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