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내 쿠르드족 전투원들. AP연합뉴스
중동에 국가 없이 산재한 쿠르드족이 미국, 이스라엘 정부와 손잡고 이란을 겨냥한 지상 공격작전을 개시했다는 보도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에 고전하고 있는 만큼, 개입 수위에 따라 전쟁에 상당한 변수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 폭스뉴스는 쿠르드족 전투원 수천 명이 이라크에서 이란으로 건너가 지상 공격작전을 개시했다고 미국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스라엘 영자지 예루살렘포스트는 쿠르드족 전투원 수백 명이 이란 내 이라크 접경지역에서 지상 활동을 개시했다고 이스라엘과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익명으로 인용해 보도했다.
폭스뉴스 보도에 따르면 전투원 중 많은 수는 이라크에 여러 해 동안 거주해온 이란 쿠르드족이며, 이번 공격작전의 일환으로 이란 북서부로 돌아가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 신정체제의 붕괴를 촉진할 반란을 촉발할 목적으로 쿠르드족과 손을 잡았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정부 당국자는 “우리(이스라엘)는 서부 이란에서 활동하는 쿠르드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다”며 민병대가 이란 내 일부 지역을 장악해 정권에 도전하도록 해 더 광범위한 봉기를 유도하는 것이 지원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전쟁 발발 다음 날인 지난 1일 쿠르드족 지도자들과 접촉해 대화를 나눴으나 이는 이라크 북부의 미군 기지에 관한 내용이었으며, 이란 체제 전복을 위해 접촉한 것은 아니라고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4일 밝혔다.
미국 CNN 방송은 중앙정보국(CIA)이 이란 내 봉기 유도를 위해 쿠르드족 민병대를 무장시키는 작업을 추진키로 하고 이란의 반정부 집단들과 이라크 내 쿠르드족 지도자들과 적극적 대화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쿠르드족 합의설 이후 ‘이라크→이란 수천명 투입’ 보도
쿠르드족은 인구 3000만∼4000만명 규모로 추산되는 산악 민족으로, 독립 국가를 세우지 못한 채 이란·이라크·튀르키예·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각국에서 소수민족으로서 박해와 탄압을 견디며 국경 없이도 강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해왔다.
중동 분쟁이 벌어질 때는 서방의 파트너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전략적 가치가 다하면 번번이 버려지는 비운의 역사를 반복하기도 했다.
시작은 1차 세계대전이었다. 1920년 서방 연합국은 세브르 조약을 통해 쿠르드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가, 3년 뒤 로잔 조약에서 이를 뒤집었다.
이후 쿠르드족 거주지는 네 갈래로 분리됐으며, 쿠르드족의 독립 국가 건설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때에도 쿠르드족은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사를 보낸 튀르키예(터키)의 국기를 달고 참전했다.
당시 튀르키예 참전용사의 과반이 전공을 세우면 독립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 쿠르드족이었다는 추산도 전해진다.
쿠르드족은 각국의 전쟁에 휘말려 난민이 되거나 전쟁범죄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특히 1987년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라크 정부군으로부터 화학 가스 공격을 받아 약 18만명(쿠르드족 자체 추산)이 학살당하는 참극을 겪었다.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시리아, 이라크에서 칼리프국(이슬람 초기 신정국) 수립을 선언하고 세력을 확장할 때도 쿠르드족이 동원됐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쿠르드족 민병대와 손잡고 IS를 격퇴하기 위한 최전선에 이들을 투입했다.
BBC에 따르면 당시 쿠르드족은 시리아민주군(SDF) 깃발 아래 여러 지역 아랍 민병대와 함께 싸웠고, 미국 주도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시리아 북동부 수만 ㎢에 달하는 영토에서 점차 IS를 몰아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의 통화 이후 미군의 시리아 북부 철수를 결정했다.
미국 정부가 사용 가치가 떨어져 방치함에 따라 쿠르드족은 튀르키예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불과 얼마 전까지 IS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던 쿠르드족이 한순간에 사실상 버림받은 것이라고 당시 외신들은 지적했다.
가디언은 “산 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쿠르드 속담을 인용해 “미국 행정부들이 쿠르드족을 포용했다가 배척했던 쓰라린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번 이란 전쟁에서도 미국이 쿠르드족에 다시 손을 내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상군 투입에 부담을 느낀 미국이 쿠르드 민병대를 ‘대리 지상군’으로 활용해 실질적인 타격 효과를 거두려 한다는 분석이다.
드론 공격 당한 이라크 이르빌의 이라크 쿠르드족 거주지역. AP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