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백인 승객에서 자리를 내주지 않아 감옥에 간 로자 파크스의 사진이 ‘로자 파크스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손호철 제공
“아이고, 피곤해.” 1955년 12월 1일 저녁, 백화점 일을 마친 로자 파크스(1913~2005)는 버스를 타자 백인 전용 좌석 뒤에 있는 유색인종 좌석 중 맨 앞자리에 지친 몸을 던졌다. 그날따라 백인 손님이 많아 백인 전용 좌석이 꽉 찼다. 다음 정거장에서 4명의 백인이 탔다.
“여봐, 자리 좀 비켜주지!” 백인 운전기사가 유색인종석 첫 줄에 앉은 사람들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3명은 일어났지만, 파크스는 그냥 앉아 있었다. “야, 일어나라니까?”, “싫은데요.” 운전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파크스는 체포됐다. 남북전쟁의 첫 수도였을 정도로 인종주의가 심하고 보수적인 ‘인종주의의 심장’ 몽고메리에서 보여준 한 중년 여성의 용기는 역사를 바꿨다. 그의 행동이 1950~1960년대로 이어진 아프리카계 민권투쟁을 격발시킨 것이다.
몇 년 전 <그린 북>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인종 분리 시절 백인 운전사가 유명한 아프리카계 피아니스트를 모시고 남부를 여행하는 이야기다. 제목처럼 당시에는 아프리카계가 여행하려면 유색인종 전용 식당과 모텔 등에 대한 정보를 실은 ‘그린북’이 필요한 시대였다. 파크스는 인종 분리법 위반으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했다.
인종 분리 정책에 의해 아프리카계는 여행을 하려면 아프리카계가 사용할 수 있는 식당과 숙소 등을 안내하는 그린북이 필요했다. 손호철 제공
남부서 아프리카계 삶은 ‘린치의 지옥’
당시 햇병아리 목사로 몽고메리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마틴 루서 킹은 민권단체들을 설득해 아프리카계 기사 고용, 아프리카계 승객 존중, 선착순 착석 등을 요구하며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버스가 텅텅 빈 채 운행해야 했고, 재정 압박에 처한 버스회사는 결국 항복했다. 하지만 파크스 가족은 직장에서 해고되고, KKK의 협박에 시달려 북부로 이주해야 했다.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는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의 중심가에 가면 그의 투쟁을 기리는 ‘로자 파크스 박물관’이 있다. 파크스는 클린턴 정부 때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받았고, 자신의 투쟁에 대한 자서전도 남겼다. 박물관에 설치된 그의 동상 앞에서 나는 존경의 묵념을 드렸다.
“남부의 나무에는 기이한 과일이 달려 있네/ 잎사귀에 피가, 뿌리에도 피가/ 검은 시체가 남부의 바람에 흔들린다네.”
백인 린치에 의해 나무에 매달린 아프리카계의 시신을 노래한 빌리 홀리데이의 ‘기이한 과일’ 앨범. 손호철 제공
전설적인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의 명곡 ‘기이한 과일’ 도입부다. KKK와 같은 백인우월주의 단체들의 린치에 의해 나무에 매달린 아프리카계의 시신을 과일로 비유한 처절한 고발이다. 남북전쟁 이후 아프리카계들이 해방되고 아프리카계의 지위가 향상돼 윌밍턴처럼 아프리카계도 공직에 진출했다. 위기의식을 느낀 백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 반격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사적 응징인 린치다.
린치는 돌출적인 사적 행위가 아니다. 이는 자유인이 된 아프리카계에게 지속적인 공포를 통해 백인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 수단이었다. 특히 린치는 지역 경찰, 법원 등 법의 비호하에 이뤄져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남부에서 아프리카계의 삶은 언제 끌려가 나무에 매달릴지 모르는 지옥 그 자체였다.
1916년 미시시피에서 제프 브라운은 출발하려는 기차를 타기 위해 달리다 백인 소녀와 부딪혔다가, 린치로 목숨을 잃었다. 1940년 제시 선톤은 앨라배마에서 백인 경찰에 ‘미스터’를 안 붙이고 이름만 불렀다가 “건방지다”며 린치의 희생자가 됐다. 많은 린치가 이처럼 사소한 이유로 이루어졌고, 25%는 ‘성폭행’ 의혹이다. 아프리카계의 백인 여성 성폭행 의혹은 ‘폭력’ 개입 여부와 무관했다. ‘백인 여자가 사는 집 문을 두드렸다’, ‘백인 여자 세 명이 있는 방에 들어갔다.’ 백인 여성을 성폭행하려 했다는 이유로 린치당한 사례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온다. 아프리카계 남자와 백인 여성 간의 성적 접촉에 대한 백인 남성들의 공포가 문제였던 것이다.
백인들에 의해 노예로 끌려와 린치 등으로 희생당한 아프리카계를 추모하는 예술 작품. 손호철 제공
린치 하면 나무에 목을 매다는 교수형을 생각하지만 아프리카계를 산 채로 화형에 처하거나 차에 매달고 달리거나 다리에서 던져버리기도 했다. 린치는 은밀히 이뤄진 것이 아니다. 미리 공지하고 수천명이 보는 가운데 장시간의 고문과 신체 절단을 거친 뒤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린치가 백인들을 결속시켜주는 일종의 ‘의식’이자 로마의 검투 같은 ‘스펙터클’이 된 것이다. 백인들은 린치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두고두고 자랑거리로 삼았고, 엽서로 만들어 기념품으로 판매했다. 절단한 신체를 기념품으로 판매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계가 린치로 목숨을 잃었을까? 한 연구에 따르면, 1877년에서 1950년까지 미시시피 654명, 조지아 587명 등 4084명이 희생된 것으로 집계됐다. 매년 56명이 희생된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1883~1941년 사이의 린치 희생자는 3285명으로, 90%가 넘는 3025명이 아프리카계였다. 71명이 멕시코계, 38명이 아메리카 원주민, 10명이 중국계, 1명이 일본계였다. 성별로는 90% 이상이 남자였다.
아프리카계에 대한 린치를 주도한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 손호철 제공
“테네시 멤피스 1868년, 20명의 아프리카계 린치당하다.” 몽고메리 ‘유산박물관(Legacy Museum)’에는 충격적인 기념물이 있다. 큰 관 같은 검은 대리석 위에 흰 글씨로 주요한 린치 사건들을 기록한 뒤 그 위를 계속 부활의 상징인 물이 흐르고, 물 위에 아프리카계 남녀와 아이가 목만 내놓은 채 절규하고 있었다. 기념물 뒤 벽에는 “그들은 자유라는 그들의 기본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으며 죽은 사람을 모두 잊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다.
정녕, 이젠 린치의 시대는 끝난 것일까
평화와 정의를 위한 국립기념관(National Memorial for Peace & Justice) 개관 요일에 맞추기 위해 애를 먹었는데 그럴 가치가 충분했다. 선생 앞에서 손을 들고 벌을 서는 초등학생처럼 목이나 가슴에 나무 족쇄를 끼고 손을 들고 있는 아프리카계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최고는 ‘1868년 텍사스 웨코 20명’ 같이 수많은 린치 희생자를 연도와 지역별로 검은 개별 만장에 표시해 전시한 것이다.
백인들의 린치에 의해 희생당한 아프리카계를 추모하는 검은 관과 만장. 손호철 제공
그 만장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자 그 아픔의 역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 끝이 장관이다. “수천명의 아프리카계가 기록도 되지 않은 수많은 린치의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들이다”라고 쓴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긴 회랑 위에 검은 관들이 끝없이 매달려 있고, 검은 벽 위로 이들의 눈물인 양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내 눈물도 끝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제 린치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끊이지 않고 터지는 아프리카계에 대한 백인 경찰의 공권력 남용과 살해행위는 변형된 린치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