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몽유도원>·<한복 입은 남자>·<초록>,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
뮤지컬 <몽유도원>의 백미인 시각장애인이 된 도미와 가면 쓴 아랑의 춤. 에이콤 제공
아이들을 건사하는 학부모나 학생들과 대면하는 선생에게 3월은 ‘태풍의 눈’ 같다. 새로운 시작을 향한 호기심과 동시에 밀어닥칠 예측 불허의 나날을 상상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는, 각오의 시기이기도 하다. 삶의 폭풍우를 헤쳐나가는 여러 형태의 항해가 최근 화제작에 많은 것도 유의미하게 와닿는다. 상상력과 아트 테크놀로지, 연극성이 집약된 항해의 무대화는 바다와 배를 시각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대 위 항해는 주인공의 운명적 전환에서 찾아온다. 떠나지 않으면 죽고, 떠나도 죽은 것과 진배없을 극단의 상황이다. 배에 오르는 순간 작품의 캐릭터들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기대보다 이전의 세계에서 이탈한 고통과 마주한다. 항해는 이동이 아니라 단절의 감각으로 먼저 시작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도미 부인’ 설화 모티브
한국적인 기개와 비워냄의 정서를 시각화한 <몽유도원>(최인호 원작, 윤호진 연출, 안재승 작, 오상준 작·편곡, 양재선 작사, 서병구 안무, 이모셔널 씨어터 무대·조명·영상)의 항해는 욕망의 붕괴와 동시에 시작된다. 5세기 백제 개로왕 시대를 배경으로 <삼국사기> ‘도미 부인’ 설화를 모티브로 한다. 꿈속에서 본 여인을 찾아내 왕비로 삼겠다는 여경(민우혁·김주택 분)의 집착은 사랑하는 부부 도미(이충주·김성식 분)와 아랑(하윤주·유리아 분)을 잔혹하게 떼어놓는다. 도미의 두 눈을 찔러 강에 버린 장면의 넘버 ‘어이해 이러십니까’는 절절함의 극치이다. 아랑에게 전하는, 부디 살아남아달라는 도미의 절창으로 1막의 하이라이트다. 왕비가 되는 날 탈출한 아랑은 죽었다고 여긴 도미를 제사장 비아(홍륜희·정은혜 분)의 도움으로 천도하고 얼굴을 망가뜨린 채 조각배에 몸을 던진다. 기적처럼 해후한 후 눈먼 도미의 피리 소리에 맞춰 흉측한 얼굴의 아랑이 민중과 어우러진 한판 마당놀이가 백미다. 압제 속에서도 되살아나는 풀뿌리 민중의 강인함을 정제된 여백과 장대한 스케일로 풀어낸 대작이다. 기개 넘치는 예술적 군무와 합창, 사운드 디자인 등이 서사를 보좌하고 묵화 같은 한국적 미장센이 감정과 메시지를 대체한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의 마지막은 우주적 판타지와 꿈을 표현한 장영실의 항해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한복 입은 남자>(이상훈 원작, 권은아 극작·작사·연출, 이성준 작곡·음악, 문성우 안무, 서숙진 무대, 구윤영 조명, 오유경 의상)의 항해 역시 단절에서 시작된다. 세종과 장영실이 서로를 인정하며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장영실의 기록 공백을 계기로 판타지 장르로 전환된다. 조선을 탈출한 그가 유럽으로 건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작품의 시작은 21세기 현재. 장영실의 공백기를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 현대의 진석(카이·신성록·이규형 분)은 극중 15세기 세종으로 변신하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서사를 이끌어간다. 현대의 고서 연구자 강배(박은태·전동석·고은성 분) 역시 과거의 장영실이 되어 연극성을 강화한다. 장영실의 발명품과 월력 계산에 대한 정밀도가 명나라의 견제를 받으면서 세종은 결단을 내린다. 장영실을 보호하기 위해 가마 사고를 조작하고 정화함대(명나라 환관 정화가 이끈 거대 함선)에 장영실을 승선케 안배한 것. 재능을 펼치며 생존하라는 배려다. 2만명이 넘는 선원을 이끌고 다닌 전설의 정화함대답게 공연장 전체가 함선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장영실이 오열하며 부르는 넘버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은 항해의 시작이자 이전 삶의 죽음이다. 5년간 생사를 넘나들며 로마에 도착한 장영실은 어린 다빈치를 만나 또 다른 꿈을 꾼다. 객석까지 넘실대는 격랑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함대는 2막 마지막 넘버에서 거대한 우주와 비차(飛車·날아다니는 차)로 시각화된다. 시공간이 중첩되고, 조선과 로마가 한 장면 안에서 공존하는 듯한 세종과 장영실의 마지막 넘버는 극장 전체를 거대한 천체망원경으로 대체한다.
뮤지컬 <초록>의 토마와 유희의 청상아리잡이. 엠비제트컴퍼니 제공
<초록>(현지은 작, 박윤솔 작곡·음악감독, 김태형 연출, 이현정 안무, 김종석 무대, 권지휘 음향, 박성희 조명, 홍문기 의상, 권민희 소품)의 항해는 보다 직접적인 생존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19세기 전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황해도 해주를 배경으로 남존여비와 가부장이 상식인 사회에서 오빠들을 제치고 선단을 이끌겠다는 유희(박란주·이한별·전민지 분)는 초록 눈을 가진 토마(박규원·손유동·김지철 분)의 성실함에 호감을 갖는다. 혼혈인에 대한 편견이 극심한 지역에서 인정받기 위해 어부들의 숙적인 청상아리 사냥에 나선 유희와 토마는 작은 고깃배로 바다를 향한다. 200석 남짓한 소극장 무대는 격랑에 흔들리는 배가 되고 토마의 동생 영진이자 토마 심연의 목소리인 류인 역할의 배우(이종석·김찬종·김재한 분)는 낚싯대와 미끼를 조정하며 항해를 돕는 선원이 되어 청상아리 사냥의 긴장감을 이끌어간다. 목숨을 건 사투 끝에 청상아리를 잡은 이들은 부부가 됐으나 극적 파국은 이제야 본격 시작이다.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의 사투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의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사투를 건 싸움과 항해. 에스앤코 제공
필사즉생 서사의 대표 격인 <라이프 오브 파이>(얀 마텔 원작, 로리타 차크라바트 극작, 맥스 웹스터 연출, 박소영 국내 협력연출)는 서사의 반 이상이 표류다.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 이민 길에 오른 파이 가족은 폭풍우로 모두 흩어진다. 홀로 살아남은 파이(박정민·박강현 분)는 가족과 문명이 사라진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구명보트에 의지한 채 죽지 못해 살아간다. 유일한 동료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뿐이다. 수많은 동물이 동승했으나 약육강식의 논리로 둘만 남은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항해는 섬세한 퍼펫(인형)들과 이를 조종하는 퍼펫티어(인형술사)의 호흡이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 연주와도 같다. 영상 디자인과 배우들과 퍼펫티어들의 호흡이 만들어낸 프로젝션 매핑을 통해 바다의 감각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파이는 가족을 잃은 충격, 끝없는 바다 위의 고독, 생존을 위해 감당해야 했을 선택을 기록하며 버티어낸다. 결국 그는 살아남지만, 그 생존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명보트에 오르는 순간 그는 이미 한 번 죽었기 때문이다. 극중 가장 격렬한,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의 사투는 결국 파이 자신과의 사투였고 그가 증언한 동물들과의 격투는 생존한 선원들과의 사투였다.
네 작품의 항해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육체적으로 파괴된 뒤 떠나는 도미와 정치적으로 죽은 뒤 떠나는 장영실, 죽음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토마와 세계가 붕괴된 뒤 표류하는 파이는 모두 궁극적으로 죽음으로서 삶을 쟁취한다. 항해는 이동이 아니라 변형의 시간이고 배는 목적지가 아닌 경계 상태다. 그 경계에서 인물들은 기존의 자신을 내려놓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분기인 3월. 우리 역시 작은 항해의 문턱에 서 있다. 새로운 학기, 새로운 관계, 새로운 환경은 늘 불안하다. 익숙한 일상이 끝나고, 아직 형태가 잡히지 않은 시간이 시작된다. 떠나지 않으면 머물 수 없고, 떠난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삶의 순간순간 항해를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자신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항해는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 아니다. 돌아와도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항해는 언제나 역설을 품는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조금씩 되살아나는 생의 에너지는 작품의 단단한 세계관과 성찰적 메시지로, 인생의 굵직한 마디로 환원된다. <한복 입은 남자>는 3월 8일, <초록>은 3월 29일, <라이프 오브 파이>는 서울에서 3월 2일, 부산에서 3월 15일까지 상연한다. <몽유도원>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상연에 이어 4월 11일부터 5월 10일까지 샤롯데씨어터에서 재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