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대한민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다. 경제 규모로나 문화적 파급력으로나 우리는 세계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선진국’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은 단순히 국내총생산(GDP) 수치나 K컬처의 유행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선진국이란 인류가 직면한 보편적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해법을 제시할 수 있고, 당장의 국익과 무관해 보이는 인류 공통의 지적 자산을 축적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나라를 의미한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 선진국은 ‘소비하는 국가’가 아니라 ‘생산하는 국가’여야 하며, 그 생산의 최상단에는 바로 ‘기초과학’이 존재한다.
미국: 유전체 문법의 해독과 인공지능의 결합
기초과학의 최전선인 미국은 이제 실험실의 벤치를 넘어 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영역에서 생명의 코드를 다시 쓰고 있다. 구글 딥마인드가 최근 발표한 ‘알파게놈’은 기초과학이 기술과 결합해 어떻게 생명 현상의 근본적인 이해를 확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압도적인 사례다.
알파게놈은 1메가베이스에 달하는 거대한 DNA 서열을 입력받아 단일 염기 수준의 해상도로 수천개의 기능적 게놈 트랙을 예측해낸다. 이는 단순히 유전자의 서열을 읽는 것을 넘어 그 서열이 3차원 공간에서 어떻게 접히고, 어떤 단백질이 어디에 붙으며, 어느 부위가 열리고 닫히는지를 동시에 파악하는 기술이다. 기존의 모델들이 계산 비용의 문제로 서열의 길이와 해상도 사이에서 타협해야 했던 것과 달리, 알파게놈은 트랜스포머 기반의 아키텍처를 통해 원거리 조절 인자가 유전자 발현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포착한다. 이는 인간 게놈의 98%를 차지하면서도 여전히 ‘쓰레기 DNA’ 혹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비부호화 영역의 기능을 해독하는 결정적인 도구가 된다.
미국이 이러한 연구를 주도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AI라는 도구를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수십년간 축적된 유전체학, 분자생물학, 후성유전학의 방대한 기초 데이터가 있었기에 AI가 학습할 ‘교과서’가 존재했던 것이다. 한국이 AI 기술에 투자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이런 성과를 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AI에게 가르칠 ‘기초과학 데이터’의 축적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중국: 진화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거미와 꿀벌의 과학
중국의 과학 굴기는 이제 양적 팽창을 넘어 질적 도약의 단계에 들어섰다. 특히 그들은 한국이 ‘돈이 안 된다’고 외면하는 진화생물학, 곤충학, 분류학 등 순수 기초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성과를 쏟아내고 있다. 최근 중국 연구진들이 발표한 거미와 꿀벌 연구는 생명 현상의 기원과 공생의 원리를 탐구하는 기초과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중국과학원과 베이징대 연구팀이 ‘사이언스 어드밴스’에 발표한 거미 유전체 연구는 ‘쓸모없어 보이는’ 생물의 진화사를 파헤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웅변한다. 연구팀은 거미가 어떻게 5만3000종 이상으로 분화하며 지구상의 3차원 공간을 점령하게 됐는지, 그 핵심 기관인 ‘실샘(spinnerets)’의 기원을 추적했다. 이들은 송곳거미, 땅거미 그리고 거미의 자매 그룹인 채찍전갈의 고품질 유전체를 해독하고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약 4억3800만년 전 실루리아기에 거미류와 전갈류의 공통 조상에서 전게놈 중복 사건이 발생했음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또한 오랫동안 학계의 논쟁거리였던 ‘실샘의 기원’에 대해 아가미 유래설이 아닌 다리 유래설이 맞음을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이용해 증명했다.
거미가 실을 뽑는 기관이 다리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당장의 한국 경제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이 ‘쓸모없는 지식’을 얻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이것이 바로 선진국의 기초과학이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역사를 규명하는 것, 그것은 인류가 자기 존재의 위치를 확인하는 철학적 행위이자 문명의 품격이다.
인도: 작지만 위대한 질문들, 그리고 생태적 경고
인도는 경제적으로는 아직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될지 모르나 기초과학, 특히 생태학과 진화생물학 분야에서는 깊은 전통과 철학을 가진 과학 강국이다. 특히 인도과학원의 사회생물학 연구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지적 통찰을 보여준다.
최근에 실린 개미 연구는 인도의 기초과학이 얼마나 예리한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이 연구는 현대 문명의 산물인 대기오염(오존)이 생태계의 바닥을 지탱하는 개미 사회를 어떻게 붕괴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개미는 체표면의 탄화수소를 냄새 맡아 동료와 적을 구분한다. 연구진은 오존이 이 화학적 신호, 특히 이중 결합을 가진 알케인 성분을 산화시켜 파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캘리포니아나 서울 같은 도시에서 흔히 관측되는 수준의 오존 농도에서도 개미의 화학적 신호는 변질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둥지로 돌아온 일개미는 동료들에게서 ‘낯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공격당했고, 군집 내의 육아 행동은 붕괴해 유충들이 죽어 나갔다. 개미 사회의 소통 단절은 곧 군집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 연구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미세먼지와 오존주의보를 보며 마스크를 쓰지만, 그 오염물질이 지구 생물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곤충들의 ‘언어’를 지워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인도의 과학자들은 첨단장비 없이도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과 질문만으로 인류세의 위기를 경고하는 거대한 담론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기초과학의 힘이다.
인류를 위한 보험, 그리고 선진국의 품격
기초과학은 본질적으로 실패를 전제로 한 모험이며 인류의 지식 지평을 넓히기 위한 희생이자 봉사다.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거미의 유전자를 읽어야 하고, 누군가는 개미의 페로몬을 분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리이며, 언젠가 인류가 마주할 미지의 위기―그것이 기후 재앙이든, 새로운 팬데믹이든―를 극복할 유일한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을 지원할 수 있는 국가는 전 세계에 몇 되지 않는다. 이는 경제적 여유뿐만 아니라 지적 성숙도가 뒷받침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 독일, 일본 그리고 인도 같은 나라들이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것은 그들이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문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보험료’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도 선진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가 유엔에 분담금을 내고 평화유지군을 파병하듯이, 기초과학 분야에서도 인류 전체를 위한 공공재를 생산해야 한다. 반도체와 배터리 기술만으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인류의 지식 보고에 한국이 기여한 ‘원천 지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