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CCTV나 보디캠 영상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는 영화다. 치밀하게 잘 만든 영화다.
/소니 픽처스 코리아
제목: 노 머시: 90분(Mercy)
제작연도: 2026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99분
장르: 액션, 범죄, SF
감독: 티무르 베크맘베토프
출연: 크리스 프랫, 레베카 퍼거슨, 칼리 레이즈, 애나벨 월리스, 크리스 설리번, 카일리 로저스
개봉: 2026년 2월 4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소니 픽처스 코리아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사고 실험이다. 10년 전쯤 자율주행 자동차의 ‘공포’를 다룬 영화를 본 적 있다. 고속도로 대신 아무도 다니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로 엄마가 차를 몰고 갔는데, 엄마가 차 밖으로 나간 뒤 하필이면 말도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가 갇혔다. 엄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이지만, 이 자동차의 방탄 성능은 너무 뛰어난 나머지 그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는다. 리뷰를 쓰기 위해 본 영화는 아니라 대략의 이야기만 기억난 영화였다. 대략 이런 내용이라고 AI에게 물어보니 답을 알려준다. 2016년작 <모놀리스>다. 편리한 세상이 됐다.
깨어나 보니 아내 살인범이 된 형사
근미래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AI 판사가 인간을 대체한다. AI 판사의 신속하고 정확한 판결은 LA의 심각한 범죄율을 감소시켰다. 잠에서 깬 주인공 형사 크리스 레이븐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고, 바로 이 AI 판사가 주재하는 법정에 소환됐다. 그가 앉은 의자는 원스톱으로 사형집행까지 가능하다. AI 판결 시스템은 그가 자신의 아내를 죽였을 확률은 97.5%라고 예측한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미리 범죄를 저지를 확률을 바탕으로 체포당하는 근미래 SF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처럼 뭔가 억울해할 만한 일은 아니다. AI 판사는 CCTV 기록이나 LA 경찰들이 차고 있는 보디캠 영상, 필요하면 SNS 자료나 CSI(우리식으로 말하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자상(刺傷) 각도나 남겨진 혈흔 분석 등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판단한다. 남아 있는 기록은 출근하다 집으로 돌아온 레이븐이 20여 분 동안 집에 머물렀고, 그 직후에 딸이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발견한다는 현관 CCTV 영상이다.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된 레이븐은 그를 체포하러 온 동료 경찰들과 난투를 벌이다 잡혀왔고.
술에 취하면 필름이 끊기는 사람도 흔히 있고, 여러 CCTV 자료에 남은 그의 과거 행적을 보면 분노조절장애를 보이는 모습도 녹화돼 있으니 그가 범인이 아닐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런데 레이븐은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처형까지 남은 시간은 90분. 90분 이내에 레이븐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
한국 개봉 제목은 <노 머시: 90분>이지만, 원제는 머시(mercy)다. 자비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머시는 이 AI 판결 시스템의 이름이다. 무자비한 법 집행의 역설을 담은 제목이지만 한국 개봉 제목은 직설적으로 바뀌었다.
베테랑 형사인 그는 이 ‘머시 시스템’ 도입을 앞장서 찬성한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자기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돼 AI 법정에 서게 됐고, 그 시스템에 의해 90분 후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었으니 아이러니다. 민완 형사인 그는 AI 판사가 제시하는 방대한 자료의 틈을 발견하고, 아내 살해 사건의 진실이 뭔지를 파헤친다.
‘러다이트’를 대신한 인간과 AI의 협업
영화는 인간의 일자리를 빠르게 대체하는 AI에 대해 산업혁명 시대의 러다이트(기계 파괴)운동 주장처럼 디스토피아를 상정하고 비판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사실이 무엇이냐를 추적하는 데 최적화돼 있는 AI 판사는 절체절명의 순간 비합리적일지라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형사의 직관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협조해 파트너 역할을 한다. <투캅스>(1993·강우석 감독)나 형사 버디 물 <마이뉴파트너>(1984)처럼 AI 판사와 인간 형사가 협조해 음모를 헤쳐나간다. 우리에겐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주인공 ‘스타로드’ 피터 퀼로 익숙한 크리스 프랫이 주인공 크리스 레이븐 역을 맡아 열연했다. 상영시간은 99분인데,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CCTV나 보디캠 영상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는 영화다. 치밀하게 잘 만든 영화다.
2018년 <서치>로 시작된 스토리텔링 형식의 확장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영화 <I H8 AI> 한 장면. 유튜브 캡처
<노 머시: 90분>의 영화감독 티무르 베크맘베토프는 아니쉬 차간티 감독의 영화 <서치>(Searching·2018)를 제작했다. 영화를 보면서 떠올렸던 작품이 미국 실리콘밸리에 거주하는 한국계 가족의 딸 실종 이야기를 다룬 <서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작품의 제작자였다. <서치>의 스토리텔링 형식은 획기적이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PC 화면과 CCTV, SNS 게시글이나 유튜브 영상 등으로도 훌륭하게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에 사용된 카메라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포함해 고프로, 드론 카메라, DSLR, 보안카메라 등 총 열두 가지였다고 밝힌 바 있다).
문득 이 형식 실험에 최초로 성공한 차간티 감독의 근황이 궁금했다. 2024년 메타와의 협업으로 <I H8 AI>라는 단편영화(사진)를 만들었다. 숫자 8의 영어 발음(에이트)앞에 ‘H’가 붙이면 발음상 ‘싫다’는 뜻의 영어 단어인 ‘Hate’(헤이트)가 된다. 즉 ‘나는 AI가 싫어요’라는 제목의 영화다. 영화는 자기가 속해 있는 산업, 그러니까 영화계에서는 AI를 싫어하지만 어떻게 AI와 ‘협업’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감독 자신과 아버지가 1990년대 가정용 비디오로 찍었던 일상 영상을 AI의 도움으로 금고털이를 한다거나, 외계인의 지구침공으로 바꾸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노 머시: 90분>의 문제의식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AI 판사를 두고 실제 배우(레베카 퍼거슨 분)가 아니라 상업 영화 최초로 AI 배우를 기용했으면 어땠을까, 라고 영화 감상 후 한 평론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만약 그런 시도를 했다면 당장 영화의 주연배우인 크리스 프랫이 소속돼 있을 배우조합이 영화를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돈 없는 독립영화나 실험 영화부터 AI 배우가 실제 배우를 대체하는 건 머지않은 미래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