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비상행동, 탈핵시민행동 등 시민단체 소속 활동가들이 지난해 11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고리 원전 2호기 원안위 수명연장 승인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실용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신규 대형 원전 2기와 소형모듈원전(SMR) 건설을 확정한 것은 그동안 강조해온 ‘에너지전환’ 공약을 사실상 폐기한 선언에 가깝다. 정부는 AI 시대의 전력 수요 폭증이라는 현실론을 앞세웠지만 정책의 방향성도, 결정 과정에서 보여준 졸속 행정도 납득하기 어렵다.
정부는 이번 결정이 숙의와 여론조사를 거친 결과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두 차례 토론회를 열고, 질문 설계부터 편향 논란이 제기된 여론조사 수치를 근거로 삼은 것은 공론화라기보다 정부가 이미 정해둔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요식행위로 보인다. 미래세대에 막대한 부담을 지우는 결정을 며칠 만에 수집된 ‘60% 찬성’ 응답에 맡긴 방식은 졸속을 넘어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원전 지을 데가 없다. 딱 한 군데 있는데, 지으려고 하다가 만 데”라고 했다. 이 발언 때문에 신규 원전 부지로 과거 원전 예정지였다가 철회된 경북 영덕군 일대가 거론된다. 전력이 필요한 곳은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수도권인데 전기 생산의 위험과 부담은 지방이 감당하는 방식이 재현되는 것인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밀집도를 기록 중인 동해안 일대에 또다시 원전을 추가하는 것은 ‘전력 식민지’ 구조를 고착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농도의 방사성 물질 방출로 최소 10만년을 격리 보관해야 하는 핵폐기물 처리 대책도 없이 일단 짓고 보자는 식의 태도는 무책임 그 자체다. “아이들에게 핵쓰레기를 떠넘길 수 없다”는 호소는 정치적 이념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절규다.
정부는 원전의 출력 조절을 통해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전은 24시간 가동을 전제로 설계된 경직성 전원이다. 잦은 출력 조절은 사고 위험을 가중시키고 경제성을 떨어뜨린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 시대에 경직된 원전이 전력망에 대거 추가될 경우 발생하는 전력 과잉 문제는 오히려 에너지 시스템 전체의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에너지 믹스, 듣기 좋은 말이지만 그 속에는 선택의 책임이 희석돼 있다.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함께 쓰겠다는 말은, 결국 위험과 비용을 특정 지역과 미래세대에 떠넘긴 채 지금의 불편한 결정을 미루겠다는 선언이다.
원전 건설로 이익을 보는 주체는 분명하다. 건설에 참여하는 대기업, 핵 산업계다. 반면 손해와 위험은 전 국민이 떠안는다. 이 문제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다. 기후위기 대응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에너지 문제는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원전을 더 짓겠다는 결단이 아니라 왜 그 선택이 불가피한지, 비용과 위험을 누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과 사회적 합의다.
이주영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