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오른쪽)이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영화관에서 손희정 영화평론가와 함께 영화 <세계의 주인> 관객과의 대화(GV)를 진행하고 있다. 박하얀 기자
“구려도 하는 것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 <세계의 주인>의 윤가은 감독은 지난해 12월 23일 전국언론노동조합 성평등위원회가 주관한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친족 성폭력 문제를 영화에 담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들여다봐야 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들여다본다면, 하는 동안 배울 것 같았다”며 이렇게 답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붙잡아온 것 역시 ‘구려도 한다’는 마음이었다. 뭔가 구린 것이 될 것만 같지만 일단 하고, 내 품에서 떠나보내는 것. 인터뷰에 꽤 공을 들이고, 이것저것 신경 쓴 취재여도 기사를 쓰면서 ‘어떡하지. 구린 것 같아’ 불안이 엄습했다. 그래도 어쩌나. 마감은 다가오고, 기사는 내 손을 떠난다.
어떤 글은 구린 무언가로서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고, 또 어떤 글은 나름의 의미를 남겼다. 가령 인터뷰이가 기사를 보고는 자신의 경험을 재해석할 수 있어 좋았다고 연락을 준다거나, 기사가 던진 질문에 호응하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독자의 반응을 접했을 때 ‘걱정과 달리 구리지 않구나’ 생각하곤 했다. 물론 비율로 따지면 이 같은 경험은 적은 편이다.
그럼에도 일단 하고 보는 일의 반복은 나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구릴 것이라는 확신에 그쳐 아예 해보지 않았다면 ‘구리지 않은’ 것들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해보고 깨지면서, 덜 구린 것을 만들어보자는 일념이 그다음을 기약하게 했다.
사실 이런 마음의 근저에는 무엇보다 이 일을 잘 해내고 싶은 열망이 있다. 건드리는 소재가 민감할수록, 드러내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세밀하게 벼려져야 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적확한 언어로 세심히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다.
10대 여성이 경험하는 사랑과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이야기를 언젠가 꼭 써보고 싶었다는 윤 감독 역시 “깜냥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영화를 선보이기까지 시간이 길어졌다고 했다. 그는 “모르는 태도”로 다가서는 일의 가치에 대해 말했다. 자신과 지인들이 지나온 시간에 덕지덕지 붙은 경험을 곱씹으며 시나리오를 쓰고, 당사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관련된 기록과 책들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나리오는 완성돼갔다.
일단 해보자는 그의 용기 덕분에 관객들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납작한 피해자 담론에서 벗어나, 피해 사실과 별개로 개인의 ‘삶’을 직시하는 눈을 갖게 됐다. 많은 이가 이 영화를 보며 위로받았다. 각자의 질문을 품고 돌아간 이들에게서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는 피해자들과 조력자들에게 연대의 박수를 보낸다.
약간의 긴장과 회의감 속에서도 무언가를 놓지 않고 하는 이들을 응원한다. 이를테면 몸담은 시민단체의 운동 방식에 간혹 의문을 표하면서도 소외된 이들의 인권 보장을 위해 곳곳에서 목소리 높이는 친구가 자랑스럽다. 거울 속 자신이 우스꽝스럽다면서도 춤 수업에 열심인 친구가 사랑스럽다. ‘구려도 괜찮아.’ 벌써 달력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 새해 다짐으로 새겨본다. 머뭇거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말해보려 한다. “혹여라도 구리면 뭐 어때. 하다 보면, 우리 덜 구려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