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과학에 만능열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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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과학에 만능열쇠는 없다

입력 2026.01.23 14:59

수정 2026.01.2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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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재 낯선 과학자
픽사베이

픽사베이

과학은 논문으로 기록되지만, 사람으로 전승된다. 우리는 이것을 ‘학풍(School)’ 혹은 ‘계보(Lineage)’라고 부른다. 관료들은 과학을 거대한 자판기처럼 생각해서 예산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노벨상이나 혁신 기술이라는 캔음료가 툭 하고 떨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실제 과학의 현장은 훨씬 더 복잡하고 인간적이며, 때로는 비효율적인 도제 시스템 속에서 작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진보가 무정부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미셀 모랑주의 언급은 인공지능(AI)으로 과학연구를 가속화하겠다는 작금의 시대에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혁신은 계획된 로드맵이 아니라 엉뚱한 호기심이 빚어낸 우연한 조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파리방의 유령들

과학의 역사는 때로 한 장의 족보처럼 읽힌다. 현대 신경생물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리콴 루오(Liqun Luo)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그 족보의 가장 빛나는 가지 중 하나다. 그의 학문적 뿌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유넝 잔(Yuh-Nung Jan)과 릴리 잔(Lily Jan) 연구실로 연결되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초파리 행동유전학을 창시한 시모어 벤저(Seymour Benzer)와 토머스 헌트 모건(T. H. Morgan)의 ‘파리방(Fly Room)’에 닿는다. 이들은 거대한 기계나 AI가 아닌, 썩은 바나나 냄새가 진동하는 좁은 실험실에서 초파리의 유전자를 조작하며 생명의 본질을 탐구해온 ‘보통 과학자’들의 계보를 잇는다.

최근 리콴 루오팀이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 ‘세포표면 조합 코드를 바꿔서 후각 회로를 다시 배선하기’는 바로 그 오랜 ‘파리방’의 전통이 어떻게 인류 지식의 최전선을 확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연구진은 초파리 수컷의 구애를 억제하는 페로몬(cVA)을 감지하는 뉴런(DA1)을 조작해 이를 구애를 촉진하는 뉴런(VA1v)의 회로로 바꿔치기했다. 그 결과 억제 신호를 받아야 할 수컷 초파리는 다른 수컷에게 미친 듯이 구애하는 행동을 보였다. 뇌의 물리적 배선을 뜯어고쳐 마음과 행동을 재설계한 이 연구는 단순히 기술적 성취를 넘어 복잡계인 뇌와 국가의 시스템이 어떻게 설계돼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이 연구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단 하나의 만능열쇠는 없다’는 것이다. 과거 로저 스페리는 뉴런들이 각자의 우편번호와 같은 화학적 표지(Chemical Tag)를 가질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리콴 루오팀이 밝혀낸 진실은 훨씬 더 우아하고 복잡했다. 뉴런의 배선을 바꾸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단 하나의 결정적인 유전자가 아니라 무려 5개 유전자의 정교한 ‘조합(Combination)’이었다.

연구진은 단순히 새로운 파트너를 끌어당기는(Attraction) 것만으로는 배선을 바꿀 수 없음을 확인했다. 핵심은 ‘밀어냄(Repulsion)’에 있었다. 원래의 파트너(DA1-PN)가 나를 싫어하게 만들고, 새로운 파트너가 나를 배척하지 않게 만드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즉 뇌의 회로는 ‘연결하려는 힘’과 ‘연결을 거부하는 힘’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는 다차원적인 조합 속에서 완성된다. 소수의 유전자만으로도 그 조합을 달리하면 무한에 가까운 다양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진화가 선택한 생존의 알고리즘이자 생명의 경제학이다.

생명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조합과 다양성의 원리가 사회제도 차원에서도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한국의 과학 정책 입안자들은 이 ‘조합의 원리’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들은 복잡한 과학의 생태계를 무시하고, ‘AI’나 ‘반도체’라는 단 하나의 만능열쇠로 모든 문을 열 수 있다고 착각한다. 뇌가 수많은 단백질의 인력과 척력을 조합해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듯, 건강한 과학 생태계는 서로 다른 분야가 섞이고, 때로는 충돌하며(Repulsion), 예상치 못한 연결(Attraction)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작동한다. 5개의 유전자가 섞여야만 비로소 뉴런의 운명이 바뀌듯 물리학, 생물학, 인문학, 공학이 다양하게 섞여야만 혁신이라는 돌연변이가 탄생한다. 하나로 획일화된 신호만을 강요하는 시스템은 모든 뉴런에 똑같은 단백질만 발현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자살행위다.

과학기술정책의 획일화

이러한 생물학적 통찰은 현재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이 처한 척박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초파리의 뇌가 다양한 단백질의 조합으로 견고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동안, 한국의 과학 정책은 ‘선택과 집중’이라는 미명하에 다양성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역주행하고 있다. 미국처럼 오랜 축적의 시간도, 중국처럼 국가 주도의 엄청난 스케일도 없이 정부는 AI와 반도체 등 당장 돈이 될 법한 특정 분야에 국가 예산을 ‘몰빵’하고 있다. 다양성이 사라진 생태계는 멸종 직전의 치타와 같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치타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에도 전멸한다. 마찬가지로 특정 유행에만 휩쓸리는 과학 생태계는 외부의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리콴 루오의 이번 연구는 AI나 거대 자본이 투입된 결과가 아니다. 수십 년간 초파리라는 하찮은 미물을 붙들고 씨름해온 기초과학자들의 집요한 호기심과 그들이 축적해온 정교한 유전학적 도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AI 시대를 선도할 뇌과학의 혁신은 AI가 없는 초파리 실험실에서 나왔다. 이는 AI 기술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AI가 학습할 데이터와 원리를 제공하는 것은 결국 다양성이 살아 있는 기초과학의 영역임을 시사한다.

과학기술 정책은 도박판의 룰렛이 돼서는 안 된다. 뇌가 특정 뉴런만을 편애하지 않고 수많은 조합을 통해 최적의 해답을 찾아내듯, 국가의 연구개발(R&D) 정책 또한 다양한 분야의 기초과학을 포용하는 ‘임계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파리의 짝짓기 연구가 뇌 질환 치료의 열쇠가 되고 생물학적 로봇 공학의 시초가 되는 것이 과학의 역사다. 혁신은 관료들이 책상머리에서 기획한 전략기술 로드맵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다양한 ‘보통 과학자’가 만들어내는 우연과 필연의 조합 속에서 태어난다. 5개의 유전자 조합만으로도 뇌의 배선을 다시 깔 수 있다는 이 경이로운 발견 앞에서 한국사회는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미래를 위한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유행이라는 단 하나의 길로 질주하다 멸종할 것인가. 다양성이야말로 혁신의 원천이라는 생물학의 교훈을 잊는다면 한국 과학의 미래에는 진화가 아닌 도태만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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