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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주의는 책을 읽는다

입력 2026.01.23 14:58

수정 2026.01.3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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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정환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독립서점(급진서점)의 역사는 깊고 넓다. 인간해방을 꿈꾼 사람들은 운동의 이상과 앎 그리고 방법론을 궁구하고 전파하기 위한 독서공간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20세기 이후 한반도에도 변혁 운동과 그것을 위한 사상문화 운동이 늘 있었다. 독서공간의 핵심은 공간 자체의 의미 외에도 인간들이 책 읽기로 서로 연결된다는 데 있겠다. 이 연결이야말로 ‘운동’의 어떤 핵심이다.

시인 김남주 / 김남주기념사업회

시인 김남주 / 김남주기념사업회

지역을 초월하는 지역 공간

연결의 공간은 서점, 독서회, 도서관 등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서점은 주로 도시에서 다양한 계층의 시민을 상대로 했다. 서점은 구체적인 지역과 어느 건물에 자리를 잡고 그 지역에 거주와 생계를 가진 사람들을 교통하고 거래하게 만든다. 즉 서점은 ‘지역’을 그 자체에 가지고 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지역의 것을 초월하는 보편의 매체인 책과 인쇄물을 취급한다. 서점은 따라서 런던, 베를린, 상하이, 도쿄 같은 근대의 글로벌 ‘대처(大處)’가 경성, 부산, 신의주 같은 접경지대를 매개로 지역과 연결하는 곳이기도 했다. 경성 종로통뿐 아니라 강릉과 함흥에도 당대의 ‘운동권’ 청년들이 출입하는 서점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한국의 권력은 냉전 문화와 강력한 검열제도에 의탁해 한반도를 지적·문화적 섬처럼 만들고자 했다. 냉전 시대 책의 발간과 이·수입은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 ‘외국 간행물 수입 배포에 관한 법률’ 등과 비밀경찰에 의한 일상적 검열에 의해 엄격히 통제됐다. 이를 넘어서거나 뚫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었기에 ‘민주화’와 사회변혁을 위한 담론적·지적 도구를 들여오는 일뿐 아니라 그 같은 이·수입 출판물을 접할 수 있는 자유 자체가 시민사회와 지식인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다음은 시인 김남주가 광주 계림동(현 대의동) 인근에 서점을 차리게 된 동기를 보여주는 평전의 일절이다.

이강의 자취방도 이 샛골목에 들어와 있었고, 훗날 녹두서점도 이곳에 차려졌으며, 박봉우·이성부·문순태·조태일 같은 저항적 문인뿐 아니라 박석무·임형택 같은 지사적 학자들도 다 이 거리에서 성장했다. 게다가 자신도 왕년에 이곳을 발바닥이 닳도록 누비고 다니던 대표적인 청년이었으니 (...) 광주 최초의 인문학 서점! 지금도 후배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잊을 수 없는 김남주의 카프카 서점 시절이 그렇게 열리는 것이다. (김형수, 김남주 평전, 다산책방, 2022, 244~245쪽)

“이 샛골목”은 계림동 헌책방 거리를 말하는데, 이 거리와 광주의 당시 청년 지식층과의 관계가 설명된다. 책방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 유통된 책들, 그리고 이후에 외국에서 이입된 불온한 사상과 언어의 유통처였다. 그래서 혁명 시인 김남주는 카프카의 이름을 빌려 ‘지역 지성’이 자라나는 책방 골목에 초국적 해방 사상을 공부하고 전파하려 공간을 하나 만들었다. 카프카 서점은 1970년대 중반에 부활하고 1990년대 초까지 방방곡곡의 대학가에서 융성했던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한 전형이었다.

과거 금서로 지정되었던 서적들. 1970~90년대초까지 융성했던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에선 금서를 다루기도 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과거 금서로 지정되었던 서적들. 1970~90년대초까지 융성했던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에선 금서를 다루기도 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특히 민족·민주·민중 ‘삼민’의 이상을 요체로 한 변혁 운동의 문화적 기관이자, 동시에 낭만과 지성이 함께 깃든 대학문화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 서점과 1970~1990년대 한국 학생운동과 지식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을 지녔고, 그 시절 대학을 다닌 많은 사람의 ‘추억’에 깊이 남게 된다.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전통과 그 21세기 버전

그러나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단지 대학가에서 대학생만을 상대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1980년에 개점해 1990년대 후반에 문을 닫은 ‘공단서점’은 공단 노동자 밀집 지구의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문화정치의 장소였다. 그곳은 지역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책을 사 읽는 곳이었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의 정보·지식이 오가고 활동가들이 교류하는 장소였다.

그렇게 1970~1990년대의 서점은 ‘운동’을 가운데 두고 지역문화·문학·지성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대학가 인근의 작은 서점들뿐 아니라 지역 도시의 중대형 서점이나 헌책방 거리도 그랬다. 다양한 시민·노동자·학생이 직접 사장이 되고 알바가 되고 고객이 돼 서점들을 운영해 키웠다.

그런데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인터넷 시대의 개막과 IMF 경제위기로 쇠퇴했다. 그 서점들의 역사는 마치 변혁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핵심이 가물가물해졌듯, 추억담 수준의 기억만 남긴 채 희미해지고 있다. 이는 책 읽기와 출판, 또 독서공간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신념과 실천의 희미해짐과 유관하다.

그러나 이 전통은 2000년대 이후의 동네서점·독립서점에 의해 모습을 바꾸어 갱신되고 또 이어지고 있다. 동네서점·독립서점은 종이책 산업의 쇠퇴와 독서문화의 변화 그리고 서민경제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투쟁하며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 생각한다.

첫째, 디지털 시대는 인간의 모든 장소를 가상세계로 증발시키고 있지만,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여전히 ‘장소감(sense of place)’을 지니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서점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건 사이의 ‘하이터치(high touch)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구체적 장소다. 오늘날 책의 물성이 새롭게 추구되는 것처럼 살아 있는 이웃 공간과 대면의 장소가 필요하다. 둘째, 오늘날 한국의 극심한 경제·인구의 수도권 집중과 불균등 발전 때문에 ‘지역 재생’과 탈독점 공간 프로젝트는 그 자체로 운동성을 내포한다. 거기서 동네서점·독립서점은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반자본주의, 기후정의, 페미니즘, 성소수자 운동 등 새로운 민주주의의 이념과 연결된 공간의 필요성 때문이다. 운동은 늘 전시 공간과 인간의 교통로와 쉼터를 필요로 한다. 서점은 그 모두를 행할 수 있는 유능한 공간이다.

지난겨울과 봄,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간이 서점을 열고 농성하면서 시민들과 함께 책을 읽고자 했던 이들을 떠올려본다. 동시에 ‘탈진실’과 ‘뇌 썩음(brain rot)’의 상징 윤석열의 권력이 동네서점·독립서점에 대한 지원 정책을 축소했음을 상기한다. 민주주의는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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