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함께 맞는 비’라는 말은 고 신영복 선생이 옥중에서 길어올린 윤리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같은 비를 맞는 자리로 내려오는 일이라는 뜻이다. 고 노회찬 대표가 ‘내 인생의 한마디’로 꼽았던 이 문장은 오랫동안 약자 곁으로 사람들을 이끌어왔다. 이 말이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었던 이유는 이것이 문장이어서가 아니라 삶의 태도였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일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진행자 김어준씨는 이재명 대통령의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임명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비를 같이 맞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은 이재명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항상 같은 마음을 먹는다며, 설사 결과가 잘못되더라도 결과적으로 옳은 결정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지난해 7월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동지란 이겨도 함께 이기고 져도 함께 지는 것, 비가 오면 비를 함께 맞아주는 것”이라며 숱한 부조리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던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두둔했다. 며칠 뒤 강 의원은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국민에게 사과하는 대신 “함께 비를 맞아주었던” 당 동지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힘이 센 사람들이 밥을 굶고 삭발을 하더니 이제는 말까지 훔쳐 간다. 그렇게 다 가져가야 속이 후련할까.
그들과 함께 비를 맞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약자를 향한 윤리가 권력자들의 내부 결속의 언어로 변질됐다는 뜻이다. 방어할 수 없는 것을 방어하려는 사람들의 우격다짐으로 사용된다는 뜻이다. 가진 게 너무 많아 문제가 생긴 사람들에게 비까지 함께 맞아주겠다고 한다. 온갖 논란과 권력형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과 ‘함께 비를 맞겠다’는 말은 정치적 입장을 떠나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힘없는 사람들은 저들의 우애를 보며 다시 한번 기운이 빠진다. 사람들이 저렇게나 따뜻한데 우리 삶은 왜 이렇게 차가울까.
다시 신영복 선생의 가르침을 생각한다. ‘함께 맞는 비’라는 말은 연대를 강조하지만 연대 그 자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지난겨울 내란에 맞서 연대했던 시민들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내란범과 연대해 ‘윤 어게인’을 외치는 시민들도 있다. 비를 함께 맞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그 비를 맞느냐는 것이다. 누구와 함께 비를 맞는지가 당신을 말해준다.
힘이 센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의 것을 가로채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센 정치인이 카메라 앞에 앉아 밥을 굶을 때, 아 이제는 굶어도 소용없겠구나 했다. 힘센 정치인이 카메라 앞에서 삭발을 할 때, 아 이젠 머리를 밀어도 소용없겠구나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힘이 센 사람들이 밥을 굶고 삭발을 하더니 이제는 말까지 훔쳐 간다. 그렇게 다 가져가야 속이 후련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