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의 경기도박물관에서 열린 ‘동양지사 안중근’ 특별전에서 관람객들이 안중근 의사의 유묵 ‘장탄일성 선조일본(長歎一聲 先吊日本)’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20일에 경기도박물관에서 ‘동양지사 안중근’ 특별전 개막식이 있었다. 2025년이 광복 80주년이며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인데, 이를 기념한 특별전의 하나로 기획한 것이다. 이번 특별전의 중심은 안중근 의사의 유묵 ‘장탄일성 선조일본(長歎一聲 先吊日本)’이다.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이 유묵을 드디어 국내에 들여오게 됐다. 이를 기념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포럼을 함께 열었다. 유묵의 뜻은 ‘긴 탄식 끝에 한마디는 먼저 일본을 조문하노라’로 박물관 측은 풀이했다. 특별전은 올해 4월 말까지 이어진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돼 그해 11월 3일 뤼순감옥으로 이송됐고, 그곳에서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뤼순감옥에 수감돼 있는 144일 동안, 자서전 집필, 동양평화론 구상, 유묵 작성, 가족과의 서신 교류 등을 했고, 다수의 기록이 남았다.
경기도박물관은 이번에 공개된 ‘장탄일성 선조일본’이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사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했다. 유묵의 수취인은 당시 뤼순감옥과 재판부를 관장하던 일본제국 관동도독부의 고위 관료였다. 이 관료의 후손이 가보로 간직해오던 것을 이번에 국내에 들여오게 된 것이다. 광복회가 영구 소장하게 됐고, 이를 경기도박물관을 통해 공개했다.
안중근 의사 ‘동양평화론’ 시대에 앞서
뤼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는 200여편의 유묵을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60여편이 현재까지 확인됐다고 한다. 다수의 휘호 외에도, 2편의 글을 남겼다. 하나는 자신의 삶에 대한 <안응칠 역사>이며, 다른 하나는 <동양평화론>이다.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고자 안 의사는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사형 집행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일본 측으로부터 그러겠다는 일종의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사형은 3월 26일 예정대로 집행됐다. 따라서 동양평화론은 완성될 수 없었다. 현재 남아 있는 동양평화론은 원래 구상했던 부분에서 서문과 전감(前鑑·국제정세 분석) 부분이고,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 등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은 비어 있다.
동양평화론에서 펼치고자 한 안중근 의사의 구상은 당시 뤼순감옥의 간수와 검찰 관계자 등의 증언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2월 14일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과의 면담 기록인 ‘청취서’에는 안 의사가 동양평화론의 본론으로 펼쳤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구상이 기록돼 있다. ①일본이 조차하고 있는 뤼순을 중립화하고 그곳에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②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한다. ③한·청·일 3국 청년들로 공동의 군단을 만들고, 그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해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을 높인다. ④한·청 두 나라는 일본의 지도하에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 ⑤한·청·일 세 나라의 황제가 로마 교황을 방문해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는다.
경기 평택항에 선적을 앞둔 수출용 자동차와 컨테이너 화물이 줄지어 있다. 문재원 기자
이들 다섯 구상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뤼순은 일본의 조차지였는데,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탈취한 것이다. 태평양 연안에 부동항을 건설하고자 한 러시아는 중요한 거점을 상실했다. 일본이 안중근 의사를 하얼빈에서 뤼순으로 이송한 것도 일본의 조차지에서 일본법에 따라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이 지역을 중립화하고 평화회의를 조직하는 것으로 분쟁의 뿌리를 자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공동 은행, 공용 화폐, 공동 군단 등의 구상은 당시로써는 매우 이상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현대의 유럽연합이나, 유로화, 나토 등을 생각하면 시대를 매우 앞선 제안으로 평가할 수 있다. 로마 교황을 방문해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는다는 구상은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였음을 감안하면, 이를 통해 세계만방에 평화 조약을 선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이후 역사를 보면, “한·청 두 나라가 일본의 지도하에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구상은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한국을 강제 병합했고, 식민지를 확대한다는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일본의 전쟁은 1945년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끝을 보게 됐다. 그리고 1950년에는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이 벌어졌다. 6·25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은 한반도에서 적대관계를 종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를 제외하면 동북아시아 지역은 대체로 평화체제를 유지해오고 있다.
1910년 이후 한 세기 이상의 역사를 보면, 평화를 유지하는 힘은 대등한 또는 호혜적인 경제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대등한 경제관계가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유럽에서 촉발됐는데, 대등한 국가들 사이에서 경제적 헤게모니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 전쟁의 발단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비용을 치르고 나서야 유럽은 공존을 추구하는 평화체제를 모색하고 실행하게 됐다.
북한 경제 발전, 동북아 평화에 필수적
안중근 의사가 꿈꾼 동양평화는 한국의 눈부신 경제력 신장으로 실현되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의 한반도, 중국 그리고 일본의 경제력을 비교해보자. 국제비교가 가능한 데이터로 네덜란드 그로닝언 대학의 메디슨 프로젝트를 이용했다. 데이터가 존재하는 1911년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중국이 한반도의 34배, 일본이 한반도의 10배였다. 2022년의 경우 GDP 규모는 중국이 한반도의 12배, 일본이 한반도의 2배로 나타났다. 한반도와 중국, 일본 사이의 경제 규모의 차이는 현저하게 줄었다. 1인당 GDP로는 한국은 2019년 일본을 추월해 동북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 지난 한 세기의 역사를 보면 한국의 경제력이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원천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을 하나로 묶어서 계산한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내에서 남북한 사이의 경제력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에도 중대한 위험 요인으로 작용한다. 북한의 경제력이 신장되지 않으면, 동북아 지역의 경제적 균형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이 동북아 경제권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에 불과하다. 1인당 GDP로도 1500달러에 머물러 한·중·일 3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낮다. 북한의 개방과 경제 발전은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