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9일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가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대한민국의 핵추진(원자력추진) 잠수함 건조가 지난 10월 29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물꼬가 트였다. 그동안 핵추진 잠수함 계획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미국의 반대가 거둬진 것이다.
1차 북핵위기가 시발점
핵추진 잠수함 계획은 1993년 1차 북핵 위기가 계기였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핵을 빌미로 한 북한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효과적인 군사 수단을 찾았다.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군 전력증강 사업을 수정해 핵추진 잠수함과 경항모 등 두 가지 사업 계획을 보고했다. 핵추진 잠수함은 ‘비닉’(비밀로 감춤), 경항모는 ‘2급 비밀’로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특히 핵추진 잠수함 사업은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인 미국과 중국,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민감한 사업이었기에 비닉사업으로 지정됐다. 당시 합참은 ‘핵추진 잠수함 3척이면 한반도 전쟁 억지력을 2배로 늘릴 수 있다’고 보고했다.
핵추진 잠수함 비닉사업이 첫발을 내디딜 때 군 책임자는 박준호 합참 무기체계 조정관(육사 18기·작고), 핵심 기안자는 조영길 합참전력기획부장(육군 소장·갑종 172기) 등 육군 출신이었다. 조 전력기획부장은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합참의장, 노무현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합참의장 퇴임 후 국방과학연구소(ADD) 고문으로 있으면서 ADD 과학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핵추진 잠수함의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할 방안 등을 연구하다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청와대 의지에 따라 핵추진 잠수함 사업은 초기부터 군을 중심으로 범정부 차원에서 진행됐다. 국방부와 원자력연구소 전문가들은 러시아 전문가들과 접촉해 핵잠수함 도면과 잠수함용 소형 원자로 기술 확보에 나섰다. 일부 언론에서 나오는 프랑스 바라쿠다급 핵잠수함을 모델로 했다거나, 기술 도입을 추진했다는 내용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는 게 당시 핵심 관계자 A씨의 설명이다.
김대중 정부 때는 209급 잠수함 사업의 후속 사업으로 러시아제 636급 잠수함을 활용하자는 방안이 나왔다. 채무상환용으로 러시아 방산 물자를 도입하는 불곰 2차 사업에 636급 잠수함을 포함시키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는 636급 잠수함이 ‘바닷속 경운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소음이 심해 도입 직전 중단됐다. 이후 등장한 것이 1800t급 잠수함을 도입하는 214급 잠수함 사업이었다.
214급 잠수함 사업은 노무현 정부에서 배치-Ⅰ 사업으로 마무리하고, 이후 차기 잠수함은 핵추진 잠수함으로 건너뛰는 방안이 거론됐다. 2003년 6월 2일, 조영길 국방부 장관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1척당 건조비 1조2000억원 규모로 4000t급 핵추진 잠수함 3척을 2020년 전에 실전 배치하겠다는 계획을 보고했기 때문이다. 2006년까지 개념설계를 마친 뒤 2007년부터 건조에 착수, 2012년 1번 핵잠을 실전배치하며, 2~3년 간격으로 2번함과 3번함을 건조해 2017년 3번함을 진수한다는 계획이었다.
지난 10월 29일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해군의 반대
핵추진 잠수함 사업에는 해군과 국방과학연구소(ADD), 한국원자력연구소 등이 대거 참여했다. 조 장관 지시로 해군 조함단은 진해에 태스크포스(TF) 성격의 핵추진 잠수함 전담부서인 ‘362 사업단’을 구성했다. 사업단 명칭은 핵추진 잠수함 개발계획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한 날짜에서 따왔다. 362 사업단은 핵잠의 설계 및 건조, 무장과 관련해 현안을 토론했다.
핵추진 잠수함 사업은 해군의 작전요구성능(ROC) 수립팀과 국방과학연구소(ADD)의 선체설계팀, 추진기관팀 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2002년부터는 ‘일체형원자로개발사업단’도 가동했다. 2002년 6월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일체형원자로개발사업단’을 구성해 이듬해 해군의 주문을 받아 핵추진 잠수함용 원자로의 기본설계를 마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초에는 사실상 자재 조달 직전 단계인 핵추진 원자로의 기본설계가 완료됐다. 해군 내부 계획에는 2010년 첫 진수를 목표로 한 6년 일정이 명시됐다.
그러나 2004년 1월 조선일보가 ‘4000t급 핵추진 잠수함 건조 계획’을 보도하면서 사업은 꼬이기 시작했다. 이 사업계획이 외부에 처음으로 노출되자 국내에 주재하는 미국과 일본, 중국 무관은 합참 정보본부를 잇달아 방문해 한국 정부가 정말로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계획하는지를 물었다. 합참은 “그런 일 없다”며 ‘오리발’로 응수했지만, 미국은 2003년 9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우라늄 농축 시설 사찰과 맞물려 예민하게 반응했다.
당시 국군기무사령부는 조선일보 보도가 214급 잠수함 2·3차 사업을 건너뛰게 돼 불이익을 받을 걸 우려한 방산업체나 이 업체와 연관된 해군 간부가 국방부를 출입하는 B기자에게 기밀을 흘린 것으로 의심했다. 기사는 2004년 1월 25일 B기자가 해외 연수를 위해 워싱턴에 도착한 다음날 보도됐다. 그 후폭풍으로 B기자는 뒤늦게 ‘국뽕’ 밀덕(밀리터리 덕후)들의 공격 대상이 됐다. 비난과 댓글에 10년 가까이 시달렸던 그는 참다못해 경찰 사이버수사대에 악성 비난 댓글을 반복하는 네티즌들을 상대로 고발장을 접수하기도 했다. 그는 핵추진 잠수함 추진론자로서 억울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당시 해군 내부에서는 당장 전력화를 목표로 하는 214급 잠수함 사업에 관심이 더 컸다. 결국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인 윤광웅 국방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362 사업단은 해체됐다. 방산 조선업체 고문 출신인 윤 장관은 이 업체가 214급 잠수함을 배치-Ⅱ·Ⅲ로 확대해 추가 건조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핵추진 잠수함 사업에 부정적이었다. 핵추진 잠수함 사업은 214급 잠수함의 2·3차 사업을 건너뛰고 진행될 계획이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해군은 핵추진 잠수함 사업이 현실성이 없다고 국방부에 보고했고, 노무현 정부에서 이 사업은 흐지부지됐다. 핵추진 잠수함 사업단이 해체된 가장 이유는 해군 내부의 ‘핵잠 기술력 부족으로 현재로서는 불가하다’는 보고와 이를 내세운 윤 장관의 결정 때문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후 사업비만 약 3조7000억원에 달하는 214급 잠수함 사업은 급물살을 탔다.
당시 국방부와 해군 고위층은 ‘핵잠 기술력 부족’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연구진은 이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관련 연구소는 이미 핵추진 원자로의 기본설계를 완성하고, 표준설계인가(SDA) 신청을 앞둔 상태였다. 핵추진 잠수함에 사용할 저농축 핵원료를 국제시장에서 구하는 것도 불법이 아니었다. 정부는 러시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저농축 핵연료를 구입할 계획이었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오른쪽)이 지난 10월 3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열린 종합 국정감사에 출석해 전날 한·미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핵추진 잠수함 추진과 관련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문무대왕연구소의 비밀
해군 사업단이 해체됐지만 군 내부적으로는 핵추진 잠수함 계획이 은밀히 계속되고 있었다. 정부는 핵추진 잠수함용 소형 원자로와 추진체 개발 등을 꾸준히 진행했다. 지난 30여 년간 연구개발에 투입된 누적 예산만 수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에서 세계 최초의 상용 일체형 소형 원자로가 나온 것도 이런 결과물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핵추진 잠수함에 필요한 소형 모듈 원자로(SMR) 연구개발에 적극적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원자로 연구과제 책임기관인 ADD에 핵추진 잠수함과 관련된 응용연구를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핵추진 잠수함의 엔진인 소형 원자로 개발을 위한 육상 시험장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 건설 계획도 세워졌다. 이는 우라늄 농축도 19.75%의 저농축 연료를 사용한 핵추진 엔진을 육상에서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문무대왕과학연구소는 경북 경주시 감포읍에 220만㎡ 대지에 한국원자력연구원의 분원 형태로 내년 1월 개소 예정으로 건설되고 있다. 문무대왕과학연구소에서는 한국형 최강 전략무기인 핵추진 잠수함에 탑재할 수 있는 핵추진 엔진을 2027년까지 개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주변국 견제 등을 우려해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개발하는 것은 70㎿급 선박용 원자로일 뿐, 잠수함용 원자로는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민간 선박용 소형 원자로는 잠수함용으로도 얼마든지 전용이 가능하다. 모듈 원전 자체는 원자력 추진 쇄빙선이나 컨테이너선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지만, 핵잠수함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무대왕연구소 착공 소식이 나왔을 때 미 뉴욕타임스(NYT)는 이 연구소가 개발하려는 해양용 소형 모듈 원전(SMR)이 한국 핵잠수함 개발에 이용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핵을 연료로 사용하는 6000~7000t급 ‘차세대 잠수함’을 거론하면서 사업에 대한 정책 의지를 분명히 했다. 문 정부는 핵추진 잠수함 사업을 2021~2025년 국방중기계획에 포함시켰고, 미국 측의 협조 거부로 이룰 수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국내 조선업체는 핵연료를 추진 동력으로 하는 잠수함 시뮬레이션 결과를 통해 현재 국내 기술력으로 충분히 설계와 건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부가 30년이 넘도록 핵추진 잠수함 계획을 비닉사업으로 수면하에서는 꾸준히 지속해왔다는 것은 지난 11월 4일 국무회의에서도 읽을 수 있다. 원종대 국방부 자원관리실장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지금까지 확보한 핵심 기술과 국가 역량을 결집하면 우리 기술로 원잠 건조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며 “미국 측과 협의를 통해 원잠용 연료를 확보하고, (20)20년대 후반 건조 단계에 진입한다면 (20)30년대 중·후반에는 선도함 진수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보고했다. 회의에서는 원잠 건조를 위한 범정부 태스크포스(TF) 구성 추진 계획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