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모두가 젊음을 동경하지만, 가짜 젊음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영포티’를 향한 조롱이 말해주는 사실이다. 미학적 비판에서 시작된 영포티 밈은 사람들이 자기가 싫어하는 온갖 것을 갖다 붙이면서 진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한 일간지에서는 이 현상이 민주당 코어 지지층에 대한 반감이라는 해석까지 등장했다. 저 쉰내 나는 분석이야말로 영포티스러움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영포티론의 독특한 점은 이 세대가 유독 남성으로만 표상된다는 점이다. MZ세대가 남녀가 비슷하게 표상되는 데 반해 여성 영포티를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여기서 이 담론이 섹슈얼리티와 연관돼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40대가 돼도 ‘젊음을 연기’하도록 더 강하게 요구받는 쪽은 여성이지만 조롱받는 쪽은 남성이라는 사실은 이것이 권력 관계의 문제임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영포티 하면 젊은 여성에게 ‘고백 공격’하는 아재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젊음의 연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연기하는가의 문제다.
모든 40대 남성이 그런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별 의미가 없다. 전체 구성원의 특징을 묘사하면서도 결코 모든 구성원을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세대론이 갖는 한계다. 영포티 밈의 유행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중년 남성들에 대한 미학적 반감이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스꽝스럽다는 걸 본인들만 의식하지 못하는 인구학적 집단이 있고, 그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소비사회의 욕망이 있다. 영포티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쓰일까 .
영포티를 향한 조롱은 “40대가 젊지 않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착각을 겨냥한다. 포티는 왜 착각하는가?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는 지난해 ‘영피프티’론을 주장하면서 몇 가지 소비 기호로 이상화된 젊음을 표상해냈다. 그들이 젊은 이유는 왕성한 구매력을 가진 그들이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구매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누구든 소비를 통해 자신을 빚어낼 수 있다는 생각, 영포티를 만들어낸 것은 젊음조차 구매할 수 있다는 소비지상주의의 신기루다.
소비를 통해 젊음에 닿을 수 있다면 늙음(늙어 보임)은 곧 실패의 증거가 된다. 젊음의 의미 과잉 사회에서 늙음은 곧 무의미가 된다. 젊음에 대한 과도한 선망의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공포와 아프고 늙고 약한 존재에 대한 경멸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박권일은 <다이내믹 코리아>(공저)에서 “영포티부터 영피프티까지 이어지는 담론이 사회적 차원에서 ‘벌거벗은 임금님’ 집단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우스꽝스럽다는 걸 본인들만 의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인구학적 집단이 있고, 그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소비사회의 욕망이 있다.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결말은 임금님이 아첨꾼 신하들을 벌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며 끝난다. 영포티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