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정부 ‘배임죄 폐지’ 속도전…지배주주 견제 장치는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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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부 ‘배임죄 폐지’ 속도전…지배주주 견제 장치는 실종

입력 2025.10.17 14:48

수정 2025.10.17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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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박사(오른쪽)가 지난 10월 14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배임죄 폐지의 문제점 진단과 대안 모색 긴급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장진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박사(오른쪽)가 지난 10월 14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배임죄 폐지의 문제점 진단과 대안 모색 긴급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70여 년 만에 배임죄가 사라질까. 정부가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이유로 형법상 배임죄 폐지를 추진하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배주주 견제 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섣불리 배임죄부터 폐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배임죄는 누군가의 재산이나 이익을 지켜야 할 사람이 일부러 그 신뢰를 깨고 불공정한 이익을 챙기는 것을 말한다. 배임죄는 그동안 대기업 총수나 전문경영인 등 주로 기업 범죄로 인식됐다.

실제 법무부가 최근 5년 동안 배임죄로 처벌된 1심 판결문과 약식명령 약 3300건을 분석한 결과, 기업 임직원이 회사 자금이나 재산을 ‘사적 목적’으로 사용한 사례가 42.7%로 가장 많았다. 이어 납품 대금이나 용역 수수료, 경비 등을 과다하게 책정해 계약한 사례가 10.5%였다. 회사의 중요 기술이나 영업비밀, 정보를 유출하는 행위도 9.4%로 뒤를 이었다.

배임죄 개선은 그동안 재계의 단골 민원이었다. 이는 배임죄에 대한 처벌 수위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회사 임원·직원처럼 ‘업무상 반복적으로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를 저버린 경우에는 10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이 부과된다. 예를 들어 회사 대표가 회사 자금을 부적절하게 다른 곳에 써서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그 과정에서 본인이나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면 업무상 배임죄가 적용된다.

재계가 배임죄를 두려워한 이유는?

특히 배임으로 인해 취득한 이득액이 ‘5억원 이상’ 등 일정 기준을 초과하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처벌 수위는 더 높아졌다. 게다가 배임죄는 미수범도 처벌되고 자격정지 처분 등도 함께 내려질 수 있다. 이처럼 배임죄 처벌 수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데는 경제활동의 기본인 ‘신뢰’를 훼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처벌 수위도 높은 데다 처벌 기준이 상대적으로 모호한 점도 재계가 꼽은 개선의 요인이었다. 그동안 재계는 수사기관과 법원이 정상적인 경영 판단이나 혁신적 투자 실패까지도 배임죄를 적용하는 사례가 반복됐다고 주장해왔다.

이 같은 사례를 막기 위해 재계는 구체적으로 형법에 ‘경영 판단 원칙’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영자가 적절한 정보와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선의로 기업 이익을 위해 내린 판단이라면, 결과적으로 실패하더라도 형사상 책임을 면제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경영 판단 원칙은 이미 재판 단계는 물론 수사·기소 단계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업무상 배임죄로 고발당한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해 검찰이 “경영상 판단 재량 범위를 넘어 현대엘리베이터 측에 손해를 저지를 뜻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현대엘리베이터는 2006년 현대상선 최대 주주 지위를 두고 현대중공업그룹과 지분 경쟁에 나섰다. 지분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현대엘리베이터는 금융사들과 현대상선 주식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파생상품 계약 체결했고, 이 과정에서 2013년 11월까지 약 3400억원의 평가 손실이 발생했다. 그러나 검찰은 경영 판단 원칙을 들어 현대엘리베이터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반면 법 집행 단계에서 자의적인 해석 여지가 있는 만큼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한 형법에 경영 판단 원칙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만만치 않다. 앞서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고동진·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은 각각 배임죄 단서 조항으로 ‘경영 판단 원칙’을 명문화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시민단체에서는 경영 판단 원칙을 명문화하더라도 법 적용이나 해석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개혁연대는 “설령 경영 판단 원칙을 명문화하더라도 그 취지는 기존에 인정되던 법리를 그대로 법률상 명시하는 것일 뿐”이라며 “경영 판단 범위가 확장되지 않음을 입법 과정에서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갑자기 배임죄 폐지 카드 꺼내든 정부

문제는 정부에서 이 같은 방식의 보완보다 배임죄 폐지로 방향을 정했다는 점이다. 법무부는 “주주 및 채권자 보호를 위해 처벌이 필요한 경우도 존재한다”며 처벌 공백을 방지할 수 있도록 대체 입법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대안 마련 없이 배임죄 폐지를 기본 방향으로 정한 데 대해 섣부르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 그동안 배임죄 폐지를 주제로 한 입법 논의가 사실상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물론이고 국민의힘에서도 최근에 배임죄 폐지가 담긴 법률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된 적은 없다.

정부가 배임죄 개선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선의의 사업주’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지나친 처벌이 투자와 고용 등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외국인의 국내 투자 결정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개선 논의에 반영됐다. 또 배임죄는 기업 임직원뿐 아니라 교회, 종중, 학교, 조합, 비법인 사단, 입주자대표회의 등 다양한 조직에 적용되면서 어떤 행위가 배임에 해당하는지 예측하기 어려웠다는 지적도 개선 배경 중 하나였다.

하지만 주주대표 소송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배임죄를 폐지하면 지배주주의 불법적인 횡포를 막을 장치가 사실상 사라진다. 회사 경영진이 회사에 손해를 끼쳤을 때 소수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책임을 묻는 주주대표 소송은 연평균 2건 정도에 불과할 만큼 저조하다.

회사를 견제할 또 다른 장치인 디스커버리 제도도 아직 도입 전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소송 당사자들이 서로 가진 증거와 관련 자료를 미리 공개하는 것으로, 개인이나 중소기업 등 소송에 약한 쪽도 상대방의 정보를 요구할 수 있어 대등한 소송이 가능하도록 돕는 장점이 있다.

특히 배임죄로 주요 경영자가 처벌받는 사례를 보면, 거래 특성상 내부자가 아니면 거래를 파악하기 어려운 사건이 대부분이라 주주대표 소송과 디스커버리 제도가 자리 잡더라도 충분하지 않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10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10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정부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10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배임죄는 재벌 기업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사익편취 등 경영자가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의사결정을 처벌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며 “완전 폐지는 찬성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경수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은 “배임죄는 재벌 총수 일가와 경영진들의 사익편취 행위에 대해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며 “배임죄 폐지에 앞서 사익편취 행위를 제도적으로 방지하거나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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