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상업 영화의 미덕을 충실히 성취하면서도 깊이 있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폭넓은 관객층을 겨냥한, 말 그대로 대형 액션 영화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목: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
제작연도: 2025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62분
장르: 범죄, 액션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 레지나 홀
개봉: 2025년 10월 1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프랑스어 ‘시네아스트(Cinéaste)’는 사전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감독, 작가, 제작자를 두루 이르는 말이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중에서도 자기 색깔이 강한 예술 지향성이 두드러지는 종사자들을 특정하는 말로 굳어져 사용되고 있다.
장편 데뷔작 <리노의 도박사>(1996)를 시작으로 <부기 나이트>(1997), <매그놀리아>(1999), <펀치 드렁크 러브>(2002), <데어 윌 비 블러드>(2007)로 이어지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초기작들은 이미 현대 고전이 됐다.
이니셜을 딴 PTA라는 애칭으로도 불리고 있는데, 그의 작품들은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뛰어난 완성도에 대한 이견은 없다.
그러나 <마스터>(2012)를 기점으로 최근 들어 공개된 일련의 작품들은 그의 영화가 너무 예술성만을 추구하는 개인적인 세계에 빠져 대중과 멀어졌다는 아쉬움을 동반했다.
열 번째 장편영화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PTA가 작정하고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 선언하고 내놓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소소한 코미디였던 전작 <리코리쉬 피자>(2021)부터 그의 각성(?)과 변화가 포착되기는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좀더 폭넓은 관객층을 겨냥한 말 그대로 대형 액션 영화라는 점이 큰 차이다.
연기 귀재들의 불꽃 튀는 각축전
제작사인 워너 브러더스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발표한 제작비는 1억3000만달러로 PTA가 연출한 영화 중 최고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영화로 기록됐다.
한 평론가는 <테넷>(2020)의 극장, OTT 동시 공개 문제로 20년 동안 관계를 이어왔던 간판스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과 결별한 사건이 최근 워너 브러더스의 제작 태도에 중요한 동기가 됐으리라 추측한다.
이후 워너 브러더스는 소위 시네아스트로 분류될 수 있는 감독들을 영입해 대규모 상업 영화를 만들도록 지원해왔다는데, <듄>(2021·드니 빌뇌브), <바비>(2023·그레타 거윅), <씨너스: 죄인들>(2025·라이언 쿠글러)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추론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관객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매력적인 요소는 출연 배우들의 면모다. 연기의 귀재라 할 수 있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숀 펜의 연기를 한 화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에게는 엄청난 경험이자 선물이다.
특히 단순한 악당을 넘어 복잡하고 난해한 인물인 스티븐 J. 록조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숀 펜의 입체적 연기는 보통의 ‘명연기’라는 표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엄청난 흡입력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락적 재미에 녹아든 시대적 고민
영화가 전개될수록 자연스럽게 앞서 소개한 연상호 감독의 신작 <얼굴>이 떠올랐다.
한 가족의 비극을 통해 세대와 시대의 문제를 조명한다는 측면에서, 또 상업 영화의 미덕을 충실히 성취하면서도 깊이 있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는 부분에서 중첩돼 보인다.
전혀 다른 나라의 다른 규모의 작품임에도 비슷한 시기에 한국 관객들을 만난 두 영화가 묘하게 닮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대부>, <지옥의 묵시록>으로 유명한 명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일찍이 “영화계에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대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도 아니고, 코엔 형제도 아니고, 바로 폴 토머스 앤더슨이다”라는 극찬으로 PTA를 추켜세웠다.
이 영화는 선배 거장의 평가가 과찬이 아니었음을 확인시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공교롭게 최근 기대 속에 공개된 한국 영화 <어쩔수가없다> 역시 나름의 작품세계가 완고한 박찬욱 감독이 작정하고 관객들을 겨냥한 작품이라 선언해 더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정작 평가는 그리 호평만으로 모이지 않은 분위기다.
비슷한 양태의 기획 의도를 천명한 작품임에도 다른 반응과 결과는 여러 각도에서 많은 생각을 안긴다.
황무지 도로 위의 생사를 건 추격전
/medialifecrisis.com
황량한 도로를 배경으로 한 자동차 추격전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후반 20분 중에서도 백미라 할 만하다.
이제 엔간한 액션 영화라면 으레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자동차 추격 장면이니 상황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지만, 여기에 감독의 작가적 창의력과 감각이 더해지면서 영화사에 기억될 빛나는 명장면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황량한 자연경관으로 인해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도로를 무대로 생사를 걸고 쫓고 쫓기는 등장인물들의 상황이 영화의 절정을 고조시키는데, 오르막과 내리막 지형에 따라 사라졌다 나타나는 차의 형체를 활용한 기막힌 촬영과 편집의 기교로 인해 촉발되는 긴장감은 관객들에게 예상 밖의 공감각적 긴장을 유발한다.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영화가 있다.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1971년 데뷔작 <듀얼>(Duel)이다. 국내에는 뒤늦게 <대추적>이란 제목으로 TV를 통해 방영된 후 <결투>, <대결>, <격돌> 등 다양한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업무차 모하비사막의 황무지를 달리던 평범한 세일즈맨 데이비드(데니스 위버 분)는 답답하게 앞서가던 트럭을 추월하지만 이로 인해 지옥 같은 질주를 계속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원래 TV 영화로 제작됐지만, 완성도를 재평가받아 몇몇 장면을 추가해 극장판으로도 공개됐다.
당연히 이후 많은 유사작품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캐나다에서 <죽음의 트럭>(Wrecker·2015)이라는 비공식 리메이크가 만들어졌고,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한 <캔디 케인>(Joy Ride·2001)은 나름의 재미를 인정받아 3편까지 속편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