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지난 8월 8일 경기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주한미군사령부 제공
“숫자보다는 능력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지난 8월 8일 주한미군 감축 전망을 묻는 한국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내놓은 답변이다. 그의 발언은 주한미군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는 것을 에둘러서 한 표현이었다.
앞서 미국은 여러 경로를 통해 4500명 규모의 주한미군 철수를 시사했다. 병력 4500명은 미 국방수권에 명시된 주한미군 숫자 2만8500명의 약 16%다. 한·미 군사 전문가들은 주한미군 4500명 철수의 대상은 지상군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지상군을 사실상 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주한미군의 ‘인계철선’ 철거를 의미한다. 지상군 병력이 부족한 미국은 주한미군 지상군 병력을 괌 등의 후방에 배치하고 중국 견제에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210여단도 철수 가능성
인계철선은 ‘Trip Wire’란 영어단어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원래 의미는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하는 부비트랩(설치용 폭약)의 폭발 장치’다. 이에 빗대 주한미군의 ‘인계철선’ 개념은 한반도 유사시 미국의 자동적인 대규모 군사 개입을 보증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주한미군이 북한 공격으로 희생자가 발생하는 순간 미군 개입의 방아쇠가 당겨진다는 의미로 ‘인계철선’이라는 용어가 확장돼 사용됐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지상군 철수는 이른바 ‘인계철선’이라는 주한미군의 대북 억제 역할이 ‘중국 앞 항공모함’이라는 미 인도·태평양 전략의 대중 견제 역할로 성격이 변하는 과정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북한을 상대로 한 재래식 전쟁은 한국군이 주도하도록 맡기고, 대신 북핵 위협에 대한 ‘확장 억제’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략의 틀을 바꾸고 있다.
당초 주한미군 ‘인계철선’ 개념의 시작은 비무장지대(DMZ) 군사분계선(MDL)과 판문점 사이를 각각 좌우로 지키던 ‘콜리어’(240GP)와 ‘오울렛’(241GP) 등 미군 2개 초소에서 시작됐다. 이 초소들은 JSA(공동경비구역) 경계부대인 캠프 보니파스에서 남방한계선 방향으로 1㎞쯤에 있다.
이 두 초소는 1991년 10월 1일자로 한국군이 지키는 곳이 되면서 인계철선 개념도 사라졌다. 그러자 한·미는 한반도 인계철선의 개념을 당시 한강 이북에 배치돼 북한군 장사정포에 노출된 미2사단으로 확대 해석했다. 이에 대해 불편해하는 시각도 꽤 있었다. 리언 러포트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2003년 “인계철선은 부정적인 용어이고, 미 2사단 장병에게는 모욕적인 발언”이라며 “인계철선은 파산한 개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에서 반발이 나왔다. 이들은 한국이 주한미군을 ‘인계철선’으로 이용하고 있다면서 북한과 중국의 선제타격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주한미군 감축과 철수를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 감축하려는 4500명이란 숫자는 미군이 한국에 순환 배치하고 있는 스트라이커 여단 병력과 대략 일치한다. 그러나 ‘한국군 주도의 대북 방어’를 공개 언급한 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부 정책 담당 차관의 발언을 감안하면, 스트라이커 여단에 이어 주한미군 제210야전포병여단도 감축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전망된다. 210포병여단은 한강 이북에 상주하는 주한미군의 유일한 전투부대로 경기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 주둔하고 있다. 이 부대는 북한군의 미사일 발사대나 240㎜ 방사포, 170㎜ 자주포 등을 겨냥한 M270 MLRS(다연장로켓시스템)를 수십대 운용하고 있다.
북한군 장사정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는 스트라이커 여단과 포병여단까지 한반도에서 빠져나가면 주한미군의 인계철선 개념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대신 한국군 포병 전력이 북한군 포병 및 기동부대 타격, 고속기동부대 저지, 중·단거리 미사일 타격 등 역할을 미 지상군의 도움 없이 다 떠맡아야 한다.
지난 7월 10일 경기 동두천시 주한미군 기지에서 미군 차량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거래 대상이 된 ‘한·미동맹’
한·미 양국은 한·미동맹을 ‘빛 샐 틈 없는’ 동맹이라고 표현해왔다. 그러나 트럼프 미 대통령은 동맹을 금전적 거래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기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다. 이제 빛 샐 틈 없는 동맹은 그저 수사적 표현일 뿐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계약 결혼’ 관계를 유지해왔던 한·미동맹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서로의 갈등을 숨긴 ‘쇼윈도 부부’가 됐다.
앞으로 한·미는 미국이 주장하는 한·미동맹의 현대화를 놓고 주한미군의 기능과 역할, 주둔 방식,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에 대해 밀고 당기기 협상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두 나라가 밀당을 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은 미국에 있다는 점이다.
첫째, 한·미동맹의 현대화는 미국이 주한미군의 기능과 역할을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인계철선 역할을 버리는 주한미군 감축과 중국을 겨냥한 전략적 유연성이 핵심이다. 구체적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 세계 재래식 군사력 5위인 한국군이 34위인 북한군을 사실상 전담해 맡으라는 것이다. 한반도 전쟁 발발 시 69만명의 증원 병력과 5개 항모전단, 3000대 전투기가 지원하기로 돼 있는 미 증원군의 한반도 전개계획인 ‘시차별부대전개목록(TPFDL)’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대신 미국은 북핵에 대응해 확장억제 지원 영역을 넓혀주겠다는 제안을 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미국은 주한미군을 한반도 우발 상황을 대비한 ‘주둔군’보다는 중국을 견제하는 발진기지의 ‘거점군’으로 성격을 바꾸고 있다. 미국이 지난 3월 작성한 임시 안보전략서를 보면 미국은 본토와 중국 견제, 대만 방위에 주력하는 것으로 돼 있다. 주한미군도 순환배치군 성격을 넘어 한반도를 거점으로 중국을 상대로 넘나드는 군대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을 바탕으로 대만해협 갈등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넘어서 한국군도 동참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셋째, 주한미군의 기능과 역할 변경은 전작권 전환과 함께 이뤄져야 하는 측면이 있다. 한·미동맹 현대화는 한국군의 대북 억제 주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미연합군의 지휘권 조정이 불가피하다. 그런 만큼 전작권은 한국 정부의 요구보다 오히려 주한미군 역할 변화에 따른 결과물로 한국군이 떠안게 될 개연성이 높다. 정부가 이재명 대통령 임기 내에 전작권을 환수하려고 미국 측에 무리하게 매달릴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미동맹은 먼저 요구하는 쪽이 관련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