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영 변호사
해가 졌는데도, 찜통에 들어앉은 것처럼 텁텁한 밤공기였다. 분리수거장에 나갔다가 서둘러 들어가려는데 버려진 에어컨 박스가 보였다. 불현듯, 가전제품 박스를 버리지 않고 종류별로 보관한다던 두 남자가 떠올랐다. 그들은 가전제품을 배달·설치하는 일을 하고, 2021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주한 연구를 수행 중이던 나에게 기후변화가 그들의 일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들려주었다.
“사람은 젖어도 물건은 젖으면 안 되거든요.”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국지성 호우가 잦아져 박스가 젖을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러면 제품 포장을 다시 해야 하는데, 시간 맞춰 배달해야 하는 가전제품의 특성상 그때 가서 박스를 다시 구하면 지체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둔다고 했다. 특수고용직인 이들은 배달 중 발생한 문제에 대해 개인이 전부 책임을 져야 하다 보니, 자신의 안전뿐 아니라 물건의 안위를 위해서도 폭우일 수가 늘어나는 것이 영 괴롭다.
폭염은 나을까? 물류센터는 냉방시설은커녕 그늘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류센터는 ‘건축법’상 창고로 분류돼 냉난방 설비 설치가 의무화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데, 사람이 일하는 곳에 말이 되는가? 겨울에는 물류센터에서 정수기 같은 제품이 얼기도 하는데, 그러면 배달 기사가 드라이어로 제품을 녹여야 한단다. 작년에서야 물류센터에 냉난방 시설을 의무화하는 개정안이 발의됐는데, 아직도 통과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국지성 호우가 잦아져 박스가 젖을 때가 많다. 그러면 제품 포장을 다시 해야 하는데, 시간 맞춰 배달해야 하는 가전제품의 특성상 그때 가서 박스를 다시 구하면 지체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둔다.
물건을 옮기다 보면 비에 젖거나 땀에 절어 옷을 갈아입고 청결한 상태로 고객의 집을 방문하고 싶은데, 그날 채워야 하는 빠듯한 일정에 쫓겨 그럴 시간조차 없다고 했다. 시간에 늦거나 청결하지 않다는 평가로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점수를 깎이면 손해가 커 스트레스도 늘어난다. 폭우나 폭염 시기에는 원청사에서 여유 있게 시간 배정을 하거나 이동 불가 시간 설정을 해주면 좋을 텐데, 설치 날짜와 시간은 전적으로 고객 의사에 달려 있기에 침수되는 상황이 와도 배달은 해야만 한다. 배달 기사에게 선택권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얼마 전 에어컨 설치 작업을 하다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양준혁씨의 사건과 관련해 삼성전자와 하청업체 대표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지난 7월 17일부터 개정된 ‘산업안전 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이 시행돼 체감온도 33도 이상인 환경에서 2시간 이상 작업 시 20분 이상 휴식시간을 부여하도록 했으나, 이 또한 특수고용직에는 적용되기 어렵다. 제도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했는데, 4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더 가혹해진 이번 여름을 두 남자는 잘 보내고 있을까?
“사람이 드는 물건인데 그것을 감안하고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더 무거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불안하다는 그의 말이 속 쓰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