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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폭력을 왜 갑질이라고 부르는가?

입력 2025.07.25 14:13

수정 2025.07.2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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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7월 14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참석한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강 후보자는 7월 23일 자진 사퇴했다. 권도현 기자

7월 14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참석한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강 후보자는 7월 23일 자진 사퇴했다. 권도현 기자

갑질 의혹을 받던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자진 사퇴했다. 정치인의 갑질 문제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하지만, 정작 갑질이라는 말의 타당성이 진지하게 검토된 적은 별로 없다.

갑질이라는 말

갑질은 문제적 용어다. 2019년에 정부가 공개한 ‘공공분야 갑질 근절을 위한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갑질은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권한을 남용하거나, 우월적 지위에서 비롯되는 사실상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상대방에게 행하는 부당한 요구나 처우를 의미한다”. 언뜻 보면 그럴듯한 개념 정의 같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의미가 너무 포괄적이고 모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폭력과 부당한 행위 모두를 갑질이라는 범주에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 가이드라인를 보면, 지위를 이용해 법을 어기거나 뇌물을 받는 행위, 인사 관련 부정, 언어∙신체적 폭력, 기관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용역 업체에 떠넘기는 행위, 부당한 업무 지시, 민원 접수를 부당하게 거부하는 행위 등이 모두 갑질이라고 불린다. 심지어 어떤 공공기관은 성폭력도 갑질로 분류한다.

그런데 뇌물을 받거나, 직원에게 사적 심부름을 시키거나, 직장 내 괴롭힘과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 따위를 모두 갑질이라 부른다면, 갑질의 해결은 정확히 무엇을 해결하겠다는 것인가? 모든 것을 의미하는 용어는 사실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구체성과 정확성 없는 언어로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갑질은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개념인가, 뭔가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홍보 문구인가?

이 용어의 더 심각한 문제는 행위의 실제 성격을 은폐한다는 점에 있다. 갑질의 전형적 사례 중 하나가 정상적 업무 범위에서 벗어난 가사노동이나 사적 심부름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갑질이 아니라 강제 노동(forced labour)에 해당하는지 따져야 할 문제다. 흔히 이 말을 들으면 ‘염전 노예’ 같은 것을 떠올릴 테지만, 불이익이나 처벌의 위협 때문에 비자발적으로 수행하는 모든 일이 강제 노동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에서는 ‘고용자가 피고용자에게 동의하지 않은 노동을 강제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을 ‘갑질했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식의 완곡어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갑질이라는 말이 이토록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것은 비판하는 쪽과 받는 쪽의 암묵적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간결하고 단순한 언어로 손쉽게 대중의 분노를 조직할 수 있으니 편하다. 누군가의 행위를 강제 노동의 관점에서 평가하려면, 복잡하고 장황한 분석과 논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행위를 갑질이라고 부르면, 이 말이 대중의 일상 언어 속에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분노를 발생시킨다. 비판을 받는 쪽에서도 폭력, 강제, 불법 같은 노골적이고 명확한 표현을 회피할 수 있으니 좋다. 갑질이라는 말의 애매모호함을 이용하며 비판을 적당히 피해 가기도 편하다. 논쟁을 말장난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강선우 후보자의 갑질 의혹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이 이러했다.

갑질로 분류되는 행위 대부분이 인간의 기본적 자유와 존엄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폭력이다. 이를 폭력의 문제로 다루는 대신,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면서(상대 진영을 향한 정치적 공격, 언론 기사의 조회 수 증가, 바이럴 콘텐츠 따위) 갑질이라는 말이 일반화됐다. 국가 제도는 이런 신조어를 배제하고, 정확한 개념을 사용해야 하지만, 한국에서는 오히려 국가가 직접 나서서 반(反)개념적 언어 사용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의 제도가 어떻게 자기 합리성을 부정하는지 알고 싶다면, 갑질이 제도의 언어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된다. 폭력의 피해자는 반복적으로 발생하지만, 덧없는 언어유희만 계속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갑을관계의 정상화

갑질이라는 말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문제는 한국사회가 불평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차이를 인정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인간과 시민의 평등한 지위를 위협하는 상황은 용납하지 않는다. 교수와 학생이 하는 일은 다르고, 직장 상사와 직원이 가진 권한과 책임도 다르고, 정치인과 비정치인의 영향력도 다르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자 시민이라는 것이 평등이라는 원칙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갑을관계 같은 표현에는 이런 원칙을 부정하는 인식이 내포돼 있다. 단순히 조직 내 지위나 권한 등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즐겨쓰는 사람도 많지만, 그때마다 인간을 차별화하는 인식이 재생산된다.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 불릴 때, 이들은 노동계약의 동등한 두 당사자가 아니라 ‘주인’과 ‘머슴’처럼 이해된다. 민주주의의 평등 원칙은 이런 종류의 인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 사이에 권력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지만, 이런 차이가 윗사람-아랫사람 관계나 갑을관계로 전환돼서는 안 된다. 조직과 업무의 특성에 따라 지위의 위아래는 존재할 수 있지만, 사람의 위아래는 없다. 계약이란 동등한 개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합의이지, 갑에 대한 을의 종속을 강제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런데 갑을관계는 정상이고, 갑질이 비정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마치 주인과 머슴의 관계는 존재할 수 있지만, 주인이 머슴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국연구재단은 갑질로 징계를 받은 연구자의 사업 신청을 제한하는데, 갑질을 “사회·경제적 관계에서 상대방(乙)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갑(甲)이 권한을 남용하여 을에게 행하는 부당한 요구나 처우”라고 정의한다. 흥미로운 점은 갑과 을의 존재 자체는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교수가 갑이고 대학원생이 을인 상황은 당연하지만, 갑질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런데 대학원생이 교육 과정에 있는 젊은 연구자라면, 교수는 그를 양성할 책임이 있는 다른 연구자이고, 이 두 연구자 사이에는 평등한 관계가 형성돼야 하지 않을까? 이들이 갑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비정상 아닌가?

여기서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일반적 경향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불평등 자체는 정상으로 인정하면서, 거기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과도한 폭력만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다. 이런 식으로 폭력이 사라질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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