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식 ‘토론의 즐거움’ 대표
지난 대선 이후 20대 남성들이 사회적 규명 대상으로 지목됐다. 많은 매체와 연구자가 경쟁적으로 ‘이대남’ 해석에 뛰어들었는데 저마다 강조점이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세대 남성에게 발견되는 돌출된 특징(극우적 경향)에 주목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나타나는 복잡성에 주목한다. 말이 무성해질수록 실체가 흐릿해진다. 쫓는 자는 많은데 잡은 자는 없다.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분석의 주요 도구로 활용되는 ‘극우’라는 개념의 문제다. 기존에 대략적인 합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극단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정도를 설명하는 말이다. 어디까지가 보수이고 어디서부터 극우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까지가 올챙이이고 언제부터가 개구리인가 하는 문제에 가깝다. 질문이 엄격해질수록 설명력이 떨어진다. 개념으로 대상을 설명하지 못하니 거꾸로 대상으로 개념을 설명하려는 전복적 설명 방식이 등장했다. ‘이대남’의 특성을 바탕으로 ‘극우란 이런 것이다’ 하고 설명한다. 자로 오이의 길이를 재는 데 실패하니까 거꾸로 오이로 자의 길이를 재려고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는 왜 필요한가. 개념어의 의미는 유동적으로 정의될 수 있지만, 적어도 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극우 개념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20대 남성이 극우적이라고 하는데 딱 그만큼만 극우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의견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세상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태도다.
대체로 ‘이대남’의 분석자들은 판단을 중지하지 않은 채 대상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어떤 이론을 가졌는지가 무엇을 관찰할지를 결정한다. 각자 자기 이론에 부합하는 통계를 쏟아내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본인들이 주목한(질문한) 지표다. 20대 남성 분석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그것들이 과연 대상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말하는 사람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선 이후 나온 20대 남성들에 관한 주장은 그 화자가 평소 하던 주장의 단순 반복인 경우가 많다.
더 큰 문제는 이해 자체를 거부하는 태도다.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과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같은 것이다. 10여 년 전 광장의 태극기부대를 규명하는 일이 사회적 과제처럼 주어졌다. 당시 많은 매체가 당사자를 취재한 탐사보도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난이 쏟아졌다. 왜 수구꼴통들 말을 들어주냐며. 왜 그런 사람들 편을 드냐며. 이해해보고자 했던 시도를 옹호라고 오해했던 것이다. 지금도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정치권의 ‘이대남’ 주목 현상에는 유난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단순한 온정으로 치부하는 태도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해는 동의와도, 온정과도 다르다.
20대 남성이 극우적이라고 하는데 딱 그만큼만 극우적인 것이다. 20대 남성이 다양하다고 하는데 딱 그만큼만 다양한 것이다. 20대 남성이 또 어떻다고 하는데 딱 그만큼만 그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의견을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세상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