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4일 서울 잠수교에서 열린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 행사에서 가면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몇 해 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본 오페라 <오페라의 유령> 중에 나오는 가면무도회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각양각색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화려한 가면 속에 이름도, 직업도, 신분도 숨긴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내려놓고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자유롭게 행동한다.
직장생활을 할 때 나는 매일 아침 가면을 쓰고 출근했다.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 ‘일 잘하고 유능한 사람’, ‘예의 바르고 다정한 사람’이란 가면이다. 상사가 돼서는 ‘조직에 충성하고 아래 직원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탈을 썼다. 그래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시고 있던 회장에게 어느 사장을 칭찬했다. 회장께서 “그 사장, 문제가 많구먼”이라고 답했다. 나는 그 사장이 인기도 많고 직원들이 잘 따른다고 얘기했는데, 회장은 “어떻게 인기가 있을 수 있나? 상사의 배역은 악역이야.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책하고 채근하는 자리라고. 그런데 직원들이 잘 따른다고? 그건 자기 임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거야. 직무 유기라고.” 사장을 추켜세워 주려던 내 의도와 달리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만약 회장 말대로 상사가 그런 역할을 하는 자리라면, 그는 인기가 있을 수 없다. 자기를 의심하고 질책하고 채근하는 사람을 좋아할 아래 직원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마땅히 써야 할 ‘사장’이란 가면을 벗고 살았던 것이다. 회장이 역정 낼 만했다.
가면 벗고 나면 심리적 안정 얻어
직장에서 모진 상사도 만났다.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들이를 한다고 해서 그 상사 집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직장에서 만난 그 상사는 온데간데없고 그렇게 자상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자애롭기 그지없는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그때 알았다. 그는 직장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출근 때마다 자신의 본모습 대신 상사라는 ‘페르소나’로 변신했다는 것을.
우리는 매일 가면을 쓰고 세상이라는 무도회에 참석한다. 직장에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가면을 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에 맞추고, 타인의 기대와 시선을 의식하며 진짜 나를 숨기고 있다. 가면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면을 쓴다. 자기 약점이나 감정을 숨기고 싶어, 혹은 갈등과 평가가 두려워 가면으로 본모습을 가린다. 또 누군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위해 사람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가면을 쓰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며 사는 걸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면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용인된 가면은 자신을 보호해주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게 하며, 가면과 본모습의 간극을 줄여가는 과정에서 진정한 성장이 이뤄지기도 한다. 나는 결점을 숨기고 싶어 완벽을 가장한 가면을 쓰고, 학교와 직장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왔다. 나 이상의 나로 위장한 가면을 썼던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나와 가면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져 내가 가면처럼 되고, 어느새 가면만큼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 있다. 처음엔 누구나 좋은 얼굴을 하지만 언젠가는 본색을 드러낸다. 나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에서 가면을 벗는다.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다. 나에 대한 아내의 평가와 판단은 이미 끝났다. 나는 더 이상 감출 게 없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서 꾸미려 하지 않는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는 건 서로 잘 안다. 그래서 관계가 부담 없이 편안하다. 특히 아내와 나 모두 나이 예순을 넘기면서 ‘진짜 나’로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존중하게 되면서 가면을 쓰는 일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다.
그렇다면 가면은 언제 벗겨질까. 나는 긴장을 늦추거나 방심하는 사이 민얼굴이 드러나기도 한다. 술에 만취했을 때,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때, 화투를 치거나 게임을 할 때, 누군가와 싸울 때도 나의 본색이 드러난다. 이판사판 할 말 못 할 말 다하게 된다. 이 밖에도 사람들이 가면을 벗는 순간이 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질 때 본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의 이익이 걸렸을 때, 큰 상실이나 실패,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약자를 대할 때 본성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가면을 벗고 나면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 감정 표현이 자유로워지고 사는 게 덜 불안하다. 자신감도 생긴다. 주변 사람과의 신뢰가 쌓이고 관계도 더 깊어진다. 미국 작가 브레네 브라운은 <마음 가면>이란 책에서 “가면을 벗고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연결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다만 가면을 벗고자 할 때 주의할 게 있다. 한꺼번에 다 드러내기보다 단계적인 노출이 필요하다. 너무 급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면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거나 자신이 상처받을 수 있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 잘 판단해야 한다.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가면을 벗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자기 보호도 중요하다. 가면은 때로 보호막 역할을 하므로, 가면을 벗고 진짜 나로 살고 싶은 욕구와 자기 보호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진짜 관계는 감정 숨기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
상대가 가면 쓴 것을 알았다면, 그 사람과는 어떻게 지내야 할까. 가면을 썼다고 그를 배척하거나, 무리하게 가면을 벗기려 해선 안 된다. 가면 뒤에 숨겨진 그 사람의 불안과 두려움을 헤아리고 이를 보듬어줄 아량이 필요하다. 그 사람의 가면을 부정하고 벗기려고 하면 오히려 더 두꺼운 가면을 쓰고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자연히 관계도 더 멀어질 수 있다. 그보다는 ‘너도 힘들겠다’라는 마음으로, 나부터 솔직해지자는 생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도 나에 대한 경계를 풀고 서서히 가면을 벗게 될 것이다.
가면이 벗겨졌을 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정체가 탄로 난 즉시 자취를 감춘다. 연락이 끊겨 메신저를 보내도 반응이 없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뻔뻔한 부류도 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세한다. 자기는 기억하지 못하니 당신도 못 본 체, 못 들은 척하라고 은연중에 강요한다. 적반하장으로 피해자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다. ‘너는 안 그러느냐?’, ‘뭐 그런 것 가지고 쫀쫀하게 구냐’라며.
가면을 벗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처음엔 두렵고 불안하다. 낯설고 어색한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가면을 벗으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우리를 옥죄고 주저하게 한다. 하지만 솔직한 감정을 말하는 순간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진심은 진심을 불러오고, 관계는 더욱더 단단해지고 오래간다.
사람은 완벽한 사람보다 조금 부족해도 솔직한 사람에게 마음이 끌린다. 센 척하지 않아도 되고,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놓고 보듬어줄 수 있는 관계가 오래간다. 서툴러도 진심이면 통한다. 진짜 관계는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괜찮고, 실수해도 용납되는 관계를 말한다. 가면을 벗는 일은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면을 벗는다는 것은 내 안의 나와 화해하고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행위다. 그것은 내면의 평화와 해방감을 선사하고, 진짜 나로 살아가게 한다. 이제는 가면을 잠시 내려놓고 가면무도회가 아닌, 민얼굴로 세상이란 무대에 설 차례다. 진짜 자신과 마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