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팔,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 등을 창립한 피터 틸 / 연합외신
“1970년대 이후 세상은 정체돼 있다.” 인공지능(AI)의 성장 속도가 인류를 격변으로 몰아넣고 있는 지금 시점에도 그는 이 진단과 신념을 철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멈춰 있었다는 게 아니라 속도가 느려졌다는 주장이다”라고 해명한다. 2025년에도 ‘정체 이론’은 타당하며 유효하다고 강조한다. 산업혁명기와 비교했을 때 21세기 과학기술 발전 속도는 너무 더디기만 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 중심에 미국의 ‘느린’ 민주주의가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로버트 라이시 전 미국 노동부 장관은 가디언 기고문에서 ‘인공지능 기업’, ‘미군 투입 기업’, ‘트럼프 돕는 미국 개인정보 수집 기업’, ‘기술 독재 지향 기업’의 공통분모를 찾으면 하나의 기업, 하나의 인물로 수렴된다고 적었다.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와 ‘피터 틸’이다. 한국의 서학개미들이 가장 전도유망하다며 주목하는 회사 중 하나이자 인물이다. 그리고 앞서 정체 이론을 굳게 믿고 있다고 언급한 ‘그’가 바로 피터 틸이다.
그는 다시 강조하지만, ‘정체 이론’을 믿는 비관론자다. 과학기술이 지금의 속도로 유지되면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바라본다. 19세기의 철도가 인간의 이동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여줬지만, 지금은 콩코드가 퇴역하는 순간을 맞았다고 슬퍼한다. 1954년 원자력 산업계는 ‘계량하기에도 너무 싼 전기에너지’를 표방했지만, 느린 기술 발전 속도로 인해 아직도 석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한탄한다. 1970년대 미국 의회가 “6년 뒤 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40여년이 지나도록 그 선언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고 개탄한다. 치매와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도 여전히 정체 상태를 맴돌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반면 자유와 투자, 경쟁의 상징 공간인 실리콘밸리는 무어의 법칙, 그리고 그 이상의 속도를 만들어내고 있는 AI의 성장을 통해 가속을 증명해내고 있다고 평한다. 두 공간과 영역에서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할까? 그가 천착해왔던 질문이다. 그가 효율적 (기술) 가속주의의 대명사로, 트럼프 포퓰리즘과 연맹을 맺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에게 평화와 복지는 곧 과학기술의 정체를 의미한다. 평화는 위험을 감내하려는 인류의 의지를 위축시키고, 복지는 과학기술에 투입해야 할 대규모 자원을 빼앗아가서다. 1800년대 산업혁명기처럼 과학기술이 가속해야만 인류를 이롭게 할 수 있는데 이를 방해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가 창업한 팔란티어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 세계 모든 전쟁에 관여하는 것도 이러한 철학과 관련이 깊다. 전쟁이라는 극도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기술의 가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걸 드러내진 않지만, 그는 잘 알고 있어서다.
실리콘밸리 가속주의자들은 느린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기술 독재’를 명확한 해결책으로 설정한다. 피터 틸은 그 정점에 있다. 트럼프와의 긴밀한 연대로 강력한 권력을 거머쥔 상태다. 세상의 정체를 돌파하고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을 구축하려는 그의 야망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지금 전 세계 민주주의자들은 자본과 권력을 동시에 틀어쥐고 있는 강력한 적수와 상대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