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계출산율 0.78은 미래의 파국을 예고하는 위기의 지표이면서, 이미 도달한 파국의 지표이기도 하다. / 픽사베이
모두가 위기에 관해 말한다. 위기 아닌 것이 없고, 위기 아닐 때가 없었다. 지난 모든 칼럼의 주제 역시 한국 정치와 사회의 위기였다. 그런데 위기란 무엇인가?
맹목적 보수주의
위기의 사전적 의미는 ‘위험한 시기나 고비’다. 여기서 시기와 고비가 구별된다는 점에 주목하자. 위기란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이면서, 이 시기의 진행 방향에 따라 미래의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고비’이기도 하다. 흔히 ‘위기’로 번역하는 서구어(영어 crisis, 프랑스어 crise, 독일어 Krise)도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 이 단어들의 원래 의미는 ‘결정적 시기’인데, 이는 ‘결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고대 그리스어 크리시스(krsis)에서 온 것이다. 현대로 오면 여기에 ‘위험한 시기’라는 의미가 추가된다. 의학 용어를 보면 두 가지 의미가 어떤 식으로 결합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지금 환자에게 심각한 증상이 나타났고, 이 증상의 진행 경과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경우, 현 상태를 위기(crisis)라고 부른다.
따라서 위기는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관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후위기를 생각해보자. 이 말은 ‘기후변화로 인한 파국의 전조가 이미 시작됐다’ 혹은 ‘파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를 모두 의미한다. ‘이미’와 ‘아직’의 차이는 꽤 크다. 파국은 이미 시작됐으니 그걸 회피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게 당연한 결론처럼 보이지만, 파국은 아직 오직 않았으니 급격한 변화가 필요 없다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위기 개념에서 결정적 시기라는 의미를 삭제하고, 위기를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기’ 정도로 이해한다.
지금 인류가 직면한 질문은 ‘모든 것을 바꿔 생존할 것인가, 익숙한 방식대로 살다가 재앙을 맞이할 것인가?’이다. 후자를 택한 사람은 기후위기에서 ‘아직’이라는 의미만 읽어낸다. 이런 태도를 맹목적 보수주의라고 부르자. 보수주의란 진보와 변화에 맞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태도인데, 우리는 지금 인류의 생존을 대가로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보수주의, 목적 없는 보수주의를 목격하고 있다.
한국의 주류는 기존 질서를 바꾸느니, 원래 살던 대로 살다가 파국을 맞겠다는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인다. /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위기와 파국의 반복
파국적 종말은 한 번에 오지 않는다. 위기는 파국을 낳고, 이 파국은 새로운 위기가 되어 더 심각한 파국을 불러온다. 한국은 수십 년간 이런 위기와 파국의 반복을 겪어 왔다.
합계출산율 0.78은 미래의 파국을 예고하는 위기의 지표이면서, 이미 도달한 파국의 지표이기도 하다. 이 수치는 ‘수십 년 후에는 대한민국이 사라질지 모른다’를 의미하는 동시에 ‘지금의 한국은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한국은 앞으로 망할지도 모른다’가 아니라 ‘한국은 이미 망했고 앞으로 더 망할 수 있다’라고 말해야 한다.
지난 20년을 돌아보자. 한국의 정치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당시의 위기는 정당 정치와 국가 권력의 작동 방식뿐 아니라 정치 공동체와 사회적 관계 일반의 형태, 지식과 문화의 생산 및 유통 방식, 공동체의 규범과 주체화 방식 등 모든 영역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했다. 이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 전체에 대한 반성과 수정을 의미한다. 한국의 대응 방식은 그러나 늘 같았다. 원래 하던 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근본적 변화를 시도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저출생 문제를 둘러싼 막연한 우려만 쏟아질 뿐, 어떤 수준의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시작하지도 못했다. 눈앞에서 화산이 폭발했지만, 원래 살던 대로 생활하면서 입으로만 큰일 났다고 중얼거리는 꼴이다.
한국의 주류는 기존 질서를 바꾸느니, 원래 살던 대로 살다가 파국을 맞겠다는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맹목적 보수주의라고 부른 태도의 극단적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파국을 피하기 위한 새로운 질서는 상상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근본적 변화(혁명) 자체가 서구 문화의 발명품이라 한국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것일까?
위기와 파국이 반복하는 곳에서 살아남은 개인은 ‘아직’의 논리,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 괜찮다’는 믿음에 의존한다. 공동체의 파국은 아직 오직 않았고,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적어도 나와 가족의 파국은 피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기존 질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으니, 이런 믿음이 유일한 희망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는 다시 맹목적 보수주의를 강화하게 된다. 지금의 내 노력이 유효하려면, 기존 질서가 그대로 유지돼야 하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상위 신분으로 올라가기 위해 죽어라 노력했는데, 평등한 사회가 오면 어떡하나? 놀랍게도 근본적 변화를 통해 공동체의 파국을 회피하려는 사람보다 기존 질서를 지지하면서 ‘나만 아니면 된다’에 베팅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낙관의 종말
지금은 낙관주의자가 되기 힘든 시대다. 작은 노력이 쌓이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현세대의 실패는 다음 세대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한가한 소리가 돼버렸다. 현세대가 위기 대응에 실패하면, 이는 다음 세대의 파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현재가 축적돼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진보의 시대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실패했지만, 다음 세대가 우리의 노력을 이어받아 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국이 파국을 낳는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탄소 중립에 실패했지만, 다음 세대가 우리의 노력을 이어갈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뻔뻔한 책임 회피나 헛소리로 취급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지금은 죽은 세대의 유산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시대다. 현세대가 해야 할 일은 좋은 세상을 위한 작은 노력을 축적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세상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낳고 키울 수 있는 사회를 지금 당장 만들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음 세대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존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재앙을 피할 방법은 없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애초에 재앙이 아닐 것이다. 결국 남는 건 선택의 문제다.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기존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인가, 원래 살던 대로 살다가 재앙을 맞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