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한국에서 절대적 명령처럼 작동하는 규칙이 있다. ‘남에게 불편을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분쟁과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첫 번째로 소환되는 것이 이 규칙이다. 그런데 불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불편의 모호함
불편의 의미는 극도로 넓다. ‘불편을 끼치지 말라’는 규칙에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면 안 된다’, ‘타인에게 괴로움을 주면 안 된다’, ‘타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따위가 모두 혼재돼 있다. 말 그대로 ‘편안하지 않은 상태’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호함에서 여러 혼란이 발생한다.
성차별적 농담을 한 직장 상사가 “불편을 끼쳤다면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불편이라는 말은 그의 잘못을 휘발시켜 버린다. 그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인지, 단순한 손해를 입힌 것인지, 싫어하는 행위를 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도 “국민 여러분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는 식의 사과를 자주 하는데, 이 역시 불편이란 말의 모호함을 악용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누군가 잘못된 말을 했을 때 그게 차별적 발언인지, 사실 왜곡인지, 타인을 모욕한 것인지 등을 구별하지 않고 “난 불편하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사례도 많다. 이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문제를 모두 감정적 호불호나 취향의 문제로 환원한다. 자기 맘에 든다, 혹은 들지 않는다를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 어떤 공적 대화도 불가능해진다.
불편의 종류
한국에서는 자기 영역을 보호하려는 강박적 경향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과 불편이라는 말의 모호함이 결합하면, 사회적 관계 자체를 파괴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남에게 불편을 끼치면 안 된다’는 규칙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다. 이 규칙을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위한 준거로 삼는 경우보다 ‘타인이 나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기 보호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때 나에게 안 좋은 것은 모두 불편이라 불린다.
내가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는 다양한 불이익이 동반된다. 그중에는 명백한 권리 침해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손해나 괴로움도 있다. 모두가 서로의 권리를 완벽히 존중하고, 친절함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도 불가피한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관리할지가 사회적 관계의 핵심 문제 중 하나다.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보자.
도심 집회는 교통 체증을 유발한다. 누군가는 시위대를 향해 “불편을 초래하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화를 내는데, 이는 부당한 요구다. 시위에 대한 권리는 시민의 기본적 권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정치적 활동이 혼잡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정도를 줄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기계 조작이 익숙지 않은 노인이 무인 키오스크 앞에 서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로 인해 뒤쪽의 다른 사람들은 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가 불편을 끼친다고 짜증 내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 노인이 잘못한 것은 전혀 없다. 사람마다 도구를 다루는 능력이 다르고, 이러한 능력 차이는 마땅히 존중돼야 한다. 이 두 가지 상황을 불편의 언어로 접근하면, 시위대와 노인은 주변에 불편을 끼치는 나쁜 존재라는 결론만 남는다. 이는 명백한 오류이고, 현실의 문제 해결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정신 장애인도 주변인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불이익의 종류를 세밀하게 구별하고, 그를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하지 않으려면 어떤 종류의 불이익을 어느 정도로 감수해야 할지 정하는 일이다. 내 불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규칙은 이런 작업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장애인을 주변 공간에서 배제하는 것만을 유일한 해법으로 남긴다.
내 것에 대한 강박
‘타인이 나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규칙은 나에게 좋지 않은 것이 완전히 사라진 나만의 청정구역을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이런 결벽증적 태도의 일반화는 단순히 세상 각박해졌다는 정도로 묘사할 것이 아니다. 괴로움을 동반하지 않는 사회적 관계는 없으므로, 내 불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관계 자체를 거부하겠다는 의미다. 요즘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불편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 관계의 다양한 요소를 구별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채, 그 어떤 불편도 거부하려는 태도만 강화되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이런 태도의 원인을 무례하고 몰상식한 사람의 존재에서 찾으려 할지 모른다. ‘갑질’이나 ‘진상’이 너무 많다 보니,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 불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태도를 깊이 체화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불편의 피해자로, 타인을 가해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결국 내 무례는 무례가 아니라 타인이 나에게 끼치는 불편을 제거하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갑질과 진상의 가해자가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며 억울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지금 교육현장을 보라. ‘교사와 다른 아이가 내 자식에게 끼치는 불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은 몇몇 ‘진상 학부모’만의 태도가 아니다. 이는 ‘내 자식만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이기주의가 아니라 외부의 나쁜 것으로부터 내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다. 이런 강박에 사로잡히면 자기주장의 객관적 정당성을 묻지 않고, 자기 행동은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지키기 위한 정당한 싸움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착각은 당연히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질수록 ‘원래 내 것’의 범위가 커지고, 불편이라는 말의 외연도 넓어진다. 자신에게 불편을 끼치지 말라는 요구는 자기 영역에 속한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다.
관계 맺음은 항상 불이익이나 괴로움을 동반한다. 그것의 정도를 줄일 순 있지만, 완전히 없앨 순 없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불편이다. 중요한 것은 불편의 종류를 구별하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를 불편이라는 말로 흐리지 않아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불이익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구별 없이 불편 일반을 강박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내가 싫은 것과는 손절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 손절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