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복수극에 열광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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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복수극에 열광하는 사회

입력 2022.07.29 14:16

수정 2022.08.0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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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왜 한국사회는 처벌 강화에 이토록 집착하는가? 죄와 벌의 등가교환이라는 판타지를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은 것인가? 강력한 처벌이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죄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닌가?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복수극은 대중문화의 주류 콘텐츠다. 권력 집단의 악행으로 고통받은 피해자가 치밀하게 복수를 실행하는 이야기는 지겨울 정도로 많다. 법의 무력함에 절망한 피해자가 폭력적 방법으로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도 흔하다. 어느 경우든 복수극은 판타지다. 이는 복수의 현실적 불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죗값의 의미 인류학은 사회관계의 기본 형태를 탐구하기 위해 이른바 ‘원시’사회에 집중해왔다. 그곳의 관계는 무언가를 주고받는 행위로 유지된다. 물건, 상징, 언어 등 모든 것이 그 대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 사이에 사람을 주고받는 행위, 즉 혼인이다. 원시사회의 혼인제도는 인류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였다. 핵심 문제는 주고받음이 교환관계와 부채관계 중 무엇인지다. 예컨대 신부를 데려오고 귀중품을 보내는 관습이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된다. 이를 돈과 여성의 교환이라고 이해하면, 일종의 인신매매가 될 것이다. 많은 인류학자가 이런 견해를 비판하며, 부채관계의 관점을 취한다. 우리 가족이 다른 가족의 여성을 신부로 맞이한다면, 그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된다. 우리가 귀중품을 보내는 것은 ‘상환 불가능한 부채’의 존재를 선언하기 위함이다(이에 관한 독보적인 연구를 수행한 사람이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다. 이 칼럼의 기본 발상은 그의 작업에서 온 것이다).

교환과 부채는 전혀 다르다. 교환은 깔끔하다. A를 주고 B를 받으면 그걸로 끝이다. 반면 화폐를 빌렸다가 갚는 경우를 제외하면, 부채는 뒤끝이 있다. 타인의 친절은 나에게 빚으로 남는다. 내가 친절로 화답하는 것은 그 빚의 상환이 아니라 거꾸로 그가 나에게 빚지게 만드는 행위다. 인간관계 대부분이 빚의 연쇄로 유지된다. 은혜, 원수, 친절, 감사, 복수 등의 원초적 관계는 모두 부채의 형식을 가진다.

죄도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부채관계의 일종이다. 그것은 타인의 생명, 재산, 행복, 신체, 믿음, 존엄성 등을 부당하게 빼앗는 행위에서 성립한다. 죄인은 일종의 채무자다. 그는 피해자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 한국어 단어 ‘죗값’은 이 관계를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표현한다. 죄를 지었으면 값을 치러야 한다. 빼앗은 것의 반환은 죗값이 되지 못한다. 누군가 당신의 물건을 훔쳤다가 나중에 돌려주면서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는 단순히 물건을 훔친 것이 아니라 내 소유 영역을 침범한 것이고, 그에 해당하는 죗값은 훔쳐간 물건의 가치보다 크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빼앗은 것이 내 행복이나 존엄성이라면, 잃은 것을 온전히 돌려받을 방법은 없다.

복수극이라는 판타지 죄인에게 강력한 처벌을 가해도 마찬가지다. 죄와 벌은 등가교환되지 않으며, 처벌로 죗값을 온전히 받아낼 수는 없다. 일단 죄에는 한계가 없지만 처벌은 제한적이다. 한 인간이 수백, 수천을 학살할 수 있지만, 가장 강력한 처벌은 그 한명의 죽음이다(더구나 사형은 민주주의 국가가 택할 방법도 아니다). 또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도 죄와 벌의 등가교환을 실현할 수 없다. 내게 폭력을 행사한 자에게 똑같은 폭력을 가한다고 해도 내 고통과 그의 고통은 등가일 수 없다. 무고한 피해자의 고통과 죄지은 가해자의 고통은 결코 동등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리 큰 고통을 줘도 내 고통을 상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처벌을 통해 죗값을 온전히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처벌은 왜 하는 것인가? 여기서 가설을 하나 세워보자. 처벌의 목적은 죗값을 받아내는 게 아니라 죗값이 상환 불가능한 부채임을 선언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훼손한 죄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만 처벌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처벌의 목적은 다양하다. 과거에는 죄인의 신체를 잔인하게 훼손함으로써 범죄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근대 감옥은 죄인을 도덕적 주체로 ‘갱생’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어느 경우든 죗값을 온전히 받는 것은 처벌의 목적이 아니다. 이는 객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수극은 현실의 부채관계를 부정하고, 죄와 벌이 등가교환되는 세상을 상상한다. 우리의 마음은 부채관계에서 답답함을, 그것의 청산에서 통쾌함을 맛보도록 만들어져 있다. 복수극이 ‘사이다’를 주는 것은 가해자를 향한 처벌과 폭력을 통해 부채관계가 완전히 청산되는 판타지를 그리기 때문이다. 간혹 청산되지 않는 부채를 다루는 작품도 있는데, 관객은 참기 힘든 당혹감을 느낀다(<복수는 나의 것>·<밀양> 등).

복수극은 단지 판타지에 머물지 않는다. 심각한 사회적 폭력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강력한 처벌’이다. 그 외의 다른 조치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촉법소년 연령 하향이 전형적 사례다. 왜 한국사회는 처벌 강화에 이토록 집착하는가? 죄와 벌의 등가교환이라는 판타지를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은 것인가? 강력한 처벌이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죄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 아닌가?

죗값을 온전히 치르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를 받는 것이다. 용서란 죄를 사(赦)해주는 것, 죗값의 면제를 의미한다. 현실 사회에서 용서의 권리는 피해자에게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실제로 가능한지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것은 종교적 구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구원(redemption)은 빚을 갚는다는 어원적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적 구원이란 신의 아들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갚아주고, 죄의 부채관계 자체를 청산하는 과정이다.

어쨌든 용서는 공동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면 죗값을 받기 위한 공동체의 최선은 일종의 보증을 서는 것 아닐까? 죗값의 부채관계를 피해자와 가해자에게만 한정하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같은 죄의 반복을 방지할 책임, 빼앗긴 것을 피해자에게 돌려줄 책임을 공동체가 져야 한다. 실제로 이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통치 권력의 주요 기능이다. 처벌은 이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일 뿐이다. 죄와 벌이 교환 가능하다는 믿음, 강력한 처벌로 죗값을 받아낼 수 있다는 환상은 공동체의 본래 책임을 망각하게 만든다. 죗값의 완전한 청산은 불가능한 목표지만, 공동체가 책임의 주체가 될 때만 조금이라도 그에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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