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 연기로 승부를 거는 연극과 다르고, 한사람이 모든 배역을 도맡는 판소리와도 다르다. 춘향이부터 향단이까지, 다시 방자부터 이몽룡까지. 배우는 전원 여자다. 소리, 춤, 연기. 모두 빠질 것 없는 최고의 여성들만이 국극 무대에 오를 자격을 갖는다.”
서이레·나몬 작가의 웹툰 <정년이> 한 장면 / 네이버웹툰
웹툰 <정년이>에 서술된 여성국극에 대한 요약이다. 여성국극은 1948년 시작된 한국의 극예술 장르로, 1950년대에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극중 1956년부터 시작된 <정년이>는 137화에 걸친 이야기 속에 최전성기 여성국극과 배우들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담아냈다. 기점을 기준으로 1956년을 2019년에 담았으니 그 시차가 60년이 넘는데, 이만한 시차를 둔 두 시대의 만남이 흥미롭다. 여성국극의 남역(男役) 주인공을 두고 <정년이>는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라 칭한다. 두 시대를 잇는 핵심어도 이것이다.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란 무엇을 뜻하는가.
1956년. 한국전쟁 휴전협정으로부터 3년가량이 지난 때다. 전쟁 복구는 더뎠고, 전투에 참여했던 남자들은 목숨을 잃거나 장애를 얻었다. 이에 따라 전쟁 동안도, 전쟁 직후도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더욱 요청됐다. 남성의 지위는 심정적으로는 높되 실질적으로는 낮은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은 그 시절, 책임감을 짊어졌으되 그에 걸맞은 존중은 퍽 얻지 못했다. 가족, 특히 남자 가족을 위한 희생이 요구되는 분위기 속에서 여자의 자기 결정권과 욕망은 간과되기 십상이었다. 여성국극은 그 시절, 여성들이 사랑하던 즐길거리였다.
추측건대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는 ‘왕자가 죽거나 다친 시대의 왕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죽지도 다치지도 않은, 여성이 연기하는 왕자가 무대에 등장해 뭇 여성들이 바라는 섬세한 연애 감정 그리고 여성에 의해 재해석된 남성다움을 드러낸다. <정년이>의 두 라이벌 주인공 윤정년과 허영서가 연기하는 남역의 스펙트럼은 분명 그러한 지점을 보여준다.
2019년. 페미니즘 리부트(2010년대 페미니즘의 재부상)라 불리던 때로부터 3년가량이 지났다. 페미니즘과 그 연관 문화의 영향 속에 세상과 젠더를 바라보는 여성들의 눈이 바뀌었다. 이 짧은 글에서 그 변화의 스펙트럼을 적절히 짚어낼 수는 없다. 다만 만화와 웹소설 등의 로맨스 장르에서 일어난 변화는, ‘나쁜 남자’에서 ‘다정하고 조신한’ 남자 주인공으로의 중심 이동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한 BL(보이즈러브)을 비롯해 여성이 그린 남성 간 연애물에 대한 애호나 작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브로맨스 코드의 포착도 이 시기를 전후해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는 ‘여성성’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정년이>는 영리하게 GL(걸즈러브) 코드를 담아내고 남성을 연기하는 여성을 무대에 세우며, 그런 ‘왕자’를 2020년대의 독자들에게 전시한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혼재된 ‘왕자’는 필연적으로 젠더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하는 매개가 된다. 여성의 욕망에 의해 그려지고 다시 구성되는 젠더에 대한 감각이 <정년이>에 담겼다.
어쩌면 이미 ‘왕자는 구실로라도 필요 없는 시대’일지도 모르겠다. ‘왕자가 죽거나 다친 시대’와 ‘왕자가 보이지 않는 시대’를 이어낸 <정년이>를 보며 든 생각에 웃음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