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정체불명의 언어가 수시로 튀어나와 정치적 대화를 방해한다. 이런 현상은 미국도 한국에 못지않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이라는 말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말의 기원
PC는 어떤 학자가 이론적으로 정의한 개념이 아니라 정치 운동과 사회적 논쟁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말이다. PC는 두 단어의 기이한 조합으로 이뤄진다. 일단 ‘올바름’은 어떤 규칙이나 조건에 부합하는 상태(정확·교정·적절 등)이며, 윤리적 ‘옳음(right)’과 구별된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정치적 규칙이나 지침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 의미를 이해하려면 PC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봐야 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20세기 초반 공산주의자들이 PC를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누군가 공산당의 지침에 부합하지 않은 발언을 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라고 지적하는 식이다(북한에서 ‘당성’이나 ‘계급성’ 같은 말이 쓰이는 방식을 떠올려보자). 처음부터 고정된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의 권위주의를 실행하기 위한 레토릭이었다.
PC가 현대적 방식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이후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에 따르면, 이 시기의 PC는 미국식 농담의 하나였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미국 대학의 좌파 학생이 성차별적이거나 인종주의적 발언을 하는 동료를 보면, 문화혁명 시기 홍위병을 흉내 내며 이렇게 주의를 준다. “동지, 그 발언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소!” 그러니까 PC는 흉내 내기, 장난, 농담에 쓰이는 ‘운동권 은어’였던 셈이다. 일종의 ‘자학 개그’이기도 한데, 서구 신좌파에게 기존 공산주의는 사상적 기원인 동시에 희화화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후 PC는 미국의 비판적 지식인 사회와 사회운동, 특히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 내에서 일반화됐다. 그 사용법은 다 제각각이라 공통된 의미를 찾아내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단순히 자신이 지지하는 규칙이나 노선을 PC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고, 너무 엄격하거나 정통적 규칙을 고수하는 상대방을 놀리기 위해 쓰기도 했다. PC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사용하는 것 자체가 ‘공산당의 엄격한 지침’이란 기존 의미를 비꼬면서 활용한 언어유희라는 점이 중요하다. “당신은 참 정치적으로 올바르군요” 따위의 표현에는 늘 반어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다.
1980년대 후반 미국 보수진영이 PC를 공격하면서, 이 말은 특정 정치 진영을 넘어 대중적 논란의 장으로 진입한다. 이때부터 ‘PC란 차별적 발언 규제에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태도’란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좌파가 PC를 비틀어 자조적 농담이나 장난으로 사용했다면, 보수주의자는 그의 원래 의미를 재추출해서 상대방을 낙인찍는 도구로 전환한 것이다.
PC의 쓸모
PC는 애초에 엄밀한 정치적 대화를 위해 탄생한 말이 아니다.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진지하게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그 말을 거창하게 포장한 이후, 좌파나 사회운동 진영도 PC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됐다. 이제 누구든지 PC라는 말을 쓸수록 우파와 보수주의에 득이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PC를 둘러싼 논란은 매우 미국적이지만, 비슷한 현상이 다른 지역에서도 반복되는 이유가 있다. 근대 민주주의의 윤리적 공백 때문이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금지된다. 그럼 차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 그런 언어를 은유적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또 어떤가?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심이나 거부감을 표출하는 것도 차별적 행위인가? 이에 대한 답은 민주주의 기본 원리에서 곧바로 도출되지 않으므로 개별 사례마다 새로운 방법을 동원해 필요한 규범을 창조해야만 한다.
이를 위한 논의 공간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객관적 규범과 개인의 취향이 뒤섞이고, 때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행위의 좋고 나쁨을 규정하기도 한다. 평등이라는 원칙과 개인의 권리를 고려하며 객관적이고 일관성 있는 규범의 ‘체계’를 건설하는 작업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그런 혼란을 틈타 보수주의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새로운 규범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상대방에게 다짜고짜 ‘PC’ 딱지를 붙인다. 그 목적은 상대방 주장을 반박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입을 막고 논의 공간 자체를 폐쇄하는 데 있다.
한국에서도 PC는 페미니즘과 차별 반대 운동을 공격하는 이들의 언어다. 운동가 중에 자신을 ‘PC주의자’나 ‘PC 지지자’로 부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런 식의 이름은 반대 진영의 낙인찍기가 남긴 결과물이다. 차별에 맞서 싸우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PC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나 발언이다. 예컨대 ‘절름발이’나 ‘외눈박이’는 차별적 표현이니 사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반대하는 건 당연히 가능하고, 찬반 토론은 꼭 필요하다. 논쟁을 통해 객관적 규범을 구성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체적 반대의 논변 없이 PC 운운하는 것은 ‘그런 지적질은 피곤하다’라고 불평하는 것과 다름없다. 규범 수립을 위한 논의의 장 자체를 거부하는 행위다. PC에 대한 지지나 비판이 아니라 문제 되는 행위가 차별인지 아닌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위해 타인의 차별 행위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지적이 정확하고 합리적이라면, 그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의 우월감을 비판하면 된다. 만일 지적 자체가 잘못됐다면, 그의 모든 것을 거부하면 된다. 어느 경우든 PC를 문제 삼는 건 뜬금없다. 만일 차별 행위에 대한 규제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위험이 있다면, 개인의 자유를 세밀하게 규정하는 작업을 먼저 시작해야 한다. 이때도 PC를 언급할 필요는 없다. PC라는 허수아비를 공격하는 집단을 향해 ‘그래도 PC는 중요하다’라고 소심하게 반박하는 사람들은 엉뚱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지금 방어해야 할 것은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차별 반대 등이지 PC가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PC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