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반지성주의’ 사용금지



주간경향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14)‘반지성주의’ 사용금지

입력 2022.06.10 14:06

수정 2022.06.13 07:40

펼치기/접기
  •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고 했다. 그 뒤에는 자유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는 이 연설의 맥락을 이해할 수가 없어 그냥 ‘알 수 없는 소리’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최근 언론과 SNS를 보니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대유행이다. 대통령 발언의 의미를 분석하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미국의 역사학자인 리처드 호프스태터를 인용하며 학술적 논의를 하는 칼럼도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반지성주의라는 언어적 상품

한걸음 떨어져 이 광경을 바라보면, 웬 소동인가 싶다. 취임사의 가장 정확한 평가는 ‘대통령이 알 수 없는 모호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도가 아닐까? 취임사에 등장한 반지성주의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고, 그가 ‘반지성주의에 대한 투쟁’을 선언한 것도 아닌데, 굳이 저 단어에 이토록 집중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이 소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특히 정치적 공간에서 언어적 표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유통된다. 어떤 단어가 주목받으면 언론은 앞다퉈 그것을 제목에 배치한다. 이는 어뷰징 기사의 제작 및 유통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단지 유행어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모든 언어적 표현이 ‘떠다니는 기표’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정된 기의가 없는 기표, 간단히 말해 아무 데나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기표를 말한다(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폴리네시아의 ‘마나’라는 말을 분석하기 위해 이 개념을 제안했고, 정치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이러한 기표의 등장이 정치적 실천의 핵심 조건임을 논증한다). 서구 문화에서는 기표와 기의의 고정된 관계를 추구하는 언어 사용과 유동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언어 사용이 공존한다. 첫 번째를 대표하는 것이 과학적 혹은 제도적 언어이고, 두 번째를 주로 활용하는 것은 문학과 정치다. 반면 한국 문화는 언어의 고정된 표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언어의 참된 가치를 무한한 변이 가능성에서 찾는다.

진보와 보수 같은 오래된 말부터 공정, 능력주의, 이대남, 이대녀, 혐오 같은 최근의 말까지 한국의 정치적 논쟁을 주도했던 언어는 모두 떠다니는 기표로 작동해왔다. 즉 아무 데나 갖다 붙일 수 있는 말일수록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반지성을 언급하는 최근의 언론 기사를 검색해보자. 정치인의 거짓 주장, 정부의 잘못된 인선과 정책, 극우 시위대의 소란, 과학과 지식인에 대한 불신 따위가 모두 반지성으로 분류된다. 과거에 적폐라는 말이 그랬던 것처럼 조만간 나쁜 것에는 어디에나 반지성이라는 딱지가 붙을지도 모른다. 반지성주의가 거짓말쟁이, 나쁜 놈, 멍청이의 또 다른 표현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언어의 사용법

한국의 언어 사용자는 창조적 역량의 극한을 보여준다. 기표와 기의는 자유롭게 붙었다 떼어지고, 필요하다면 어떤 말이든 떠다니는 기표로 전환할 수 있다. 반면 언어의 고정된 표준을 수립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인터넷 문화를 위한 비옥한 토대일지는 몰라도 정치 공동체의 유지에는 해악을 미친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은 여전히 별 진전이 없다. 단지 극단적 의견 차이 때문이 아니라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황 때문이다. ‘여성 혐오’에서 ‘혐오’가 떨어져 나와 ‘남성 혐오’라는 새로운 기표가 탄생하고, 학술적 개념으로 정의된 ‘젠더’가 ‘젠더 갈등’이라는 전혀 엉뚱한 의미를 획득하는 환경에서, 상이한 의견 사이의 합리적 소통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협은 시민들이 서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다. 서로 말이 통해야 싸우든 협력하든 할 것이 아닌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와 그에 대한 반응은 소통 불가능성의 위험을 드러낸다. 그는 자유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제시하는데, 이 부분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가 유린된다면 “모든 자유 시민은 연대해서 도와야 합니다”라고 말한 뒤에, “모두가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규칙을 지켜야 하고, 연대와 박애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한다. 여기서 “공정한 규칙”이 갑자기 왜 튀어나온 것인지 아무리 읽어봐도 모르겠다. 그 아래에서는 한국의 상황을 언급하며, “과학과 기술 그리고 혁신은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우리의 자유를 확대하며 우리의 존엄한 삶을 지속가능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연대와 박애가 어떻게 과학과 기술로 넘어가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취임사 전체에 걸쳐 자유민주주의라는 냉전 시절 용어와 민주주의의 기초 개념들(연대·시민·공동체·존엄·인권)이 뒤섞이고, 전혀 다른 문제들(권리로서의 자유·시장의 자유·과학과 기술)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된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잡다한 관념을 아무거나 꺼내 커다란 통 속에 넣고, 대충 흔들어 섞어놓은 느낌이다. 대통령이 언급하는 핵심 개념의 대부분이 모호하고,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이러한 문제는 그의 말을 듣는 쪽으로도 확장된다. 원래 발언의 고정된 의미가 없으니, 대중 마음대로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취임사에 대해 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한 언론 기사와 칼럼이 실제로 많다. 그 대부분의 목적은 각자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대통령의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의견과 의견 사이의 토론이 아니라 서로 딴소리하며 ‘아무 말’에 또 다른 ‘아무 말’을 보태는 상황에 가깝다.

앞서 분석했듯이, 반지성주의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이 말은 사용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이미 떠다니는 기표로 변모하고 있다. 자유라는 말의 상황도 별반 다른 것 같지 않다. 취임사에 등장한 단어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유행할지는 모르겠지만, 널리 사용되면 될수록 사람들이 같은 단어를 발화하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답답한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반지성주의 같은 말은 아예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다소 유치한 방법이지만, 비판적 언어가 타인에 대한 욕설로 변형되는 것을 방지하고, 영향력 있는 기표가 의사소통의 방해물로 작동하는 상황을 막으려면, 그것의 재생산과 유통을 멈추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