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이준석의 ‘문제적 세계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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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이준석의 ‘문제적 세계관’에 관하여

입력 2022.05.13 14:18

수정 2022.05.1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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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대표와의 첫번째 토론에서 보여준 모습은 일종의 데자뷔 같다. 한편으로는 뻔하디뻔한 ‘통속적 합리성’을 재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 국가 권력의 태도를 전형적으로 반복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5월 3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관련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촉구하며 발언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5월 3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 관련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촉구하며 발언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통속적 합리성

다소 도식적으로 요약하자면, 논변의 합리성은 전제의 정당성, 개념의 정확성, 개별 주장 사이의 논리적 일관성 등으로 구성된다. 수학적 증명 과정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자신을 합리적이라 평가하는 사람 중 다수가 세 번째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부터 ‘통속적 합리성’이 태어난다. 예컨대 ‘시험을 통해 채용하는 것이 공정하다’라는 전제에서 ‘시험을 보지 않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결론 내리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전제와 결론 사이의 논리적 관계만 신경 쓸 뿐, ‘시험’과 ‘공정’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고 전제 자체가 정당한지 묻지도 않는다.

이준석의 방식도 마찬가지다. 논리 전개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정치적으로 왜곡된 개념을 사용한다. 이는 그의 기본적인 세계관에서 비롯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시민’ 혹은 ‘일반 시민’이라는 말이다. 전장연 비판의 핵심에는 ‘시위대 대 불편을 겪는 시민’이라는 대립 구도가 있는데, 도대체 그가 말하는 시민이란 누구인가? 지하철 시위에 참여한 장애인은 특수 시민이나 비시민인가? ‘시위대가 시민에게 불편을 끼치고 있다’는 말은 사실 묘사가 아니라 특정 집단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낙인찍기일 뿐이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도 시민이고 시위를 하는 사람도 시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민적 저항 운동의 한계를 정하는 작업이다. 이에 대한 태도는 두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첫째, 시민의 정치 참여는 보장해야 하지만, 결코 사회적 피해와 혼란을 발생시켜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둘째, 사회적 피해와 혼란이 발생하더라도 정치 참여를 최대한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이 둘 사이 연속적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그중 어디에 위치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숙의민주주의다.

현대 민주주의 발전을 주도해온 건 두 번째다. 이른바 선진국의 과거와 현재를 보라. 시위대는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학생은 학교를 점거하고, 장애인은 대중교통을 중지시키고, 노동자는 생산 활동을 멈춘다. 저항 운동은 다른 시민의 불편을 초래하는데, 그중 상당수가 의도된 것이다. 그렇지만 ‘시민에게 불편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오늘은 타인의 정치적 행동이 나에게 불편을 주지만, 언젠가는 나의 정치적 행동이 타인에게 불편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의 불편을 이유로 타인의 정치 참여를 규제한다면, 언젠가 타인의 불편을 이유로 내 정치적 권리가 제한될 것이다.

물론 첫 번째 입장에서 ‘시위대가 의도적으로 지하철 운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단 이것이 합리적 주장이 되려면 정치적 낙인찍기나 집단적 증오와 단절하고, 정치적 권리에 대한 규제를 정당화할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특히 시민의 정치적 행동이 공공서비스를 방해할 수 있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 중, 전자의 민주주의가 더 발전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장 한국만 봐도 장애인 이동권이 이 정도라도 보장된 것은 쇠사슬로 몸을 묶고 버스를 멈춰 세웠던 장애인들의 투쟁 덕분 아닌가?

이준석의 세계

다음 사실에 주의하자. 이준석의 주장은 첫 번째 입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의 목적은 두 입장 사이의 정치적 논의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정치적 행동에 관한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증오를 모아 소수를 공격하는 데 집중된다. 이러한 태도는 국가와 시민에 대한 그의 기본적 이해에서 비롯한다.

이준석은 박경석과의 토론 초반에 흥미로운 말을 한다. 전장연과 국민의힘이 ‘파트너십’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시민과 여당의 관계를 ‘파트너십’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토론이 이어지며 저 말의 진짜 의미가 드러난다. ‘우리가 당신들 요구를 검토해보고 들어주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 그냥 기다리라’는 것이다. 권위주의 국가 권력의 전형적 태도다. 시민은 ‘읍소’하고, 국가는 그중 일부를 ‘수락’해준다. 국가는 결코 ‘안 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검토할 테니 기다리라’고 명령한다. 기다림에 지친 시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하면, 앞뒤 맥락은 다 잘라먹고 저항 방식을 문제 삼는다.

민주주의 국가의 존재 이유는 시민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함이다. ‘문명적’이고 ‘선진적’인 국가라면 어디에서나 다음 원칙이 수립돼 있다. 장애인 차별은 실재하고, 국가 권력 집단은 이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이준석은 비민주주의적 세계관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그의 세상에는 다수자와 소수자의 불평등도, 시민 평등의 원칙도, 국가와 시민의 의무-권리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인간은 불평등해야 한다’가 원칙이고, 다수자가 소수자를 희생시키는 것이 정상으로 인정된다.

이런 세계관이 늘 한국사회를 지배해왔지만, 다수 집단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능력이 없었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어차피 자신들이 주류이므로). 하지만 불평등과 차별에 저항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성장해왔고, 이러한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이준석이 등장했다. 그가 ‘공정’을 자신의 가치로 제시했을 때, 윤석열 당선인이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했을 때, 한국의 주류 세계관은 명확한 자기 언어를 획득했다.

‘혐오’는 이준석을 비판하기에 너무나 부족한 말이다. 이 말은 집단적 증오를 재생산하는 사회적 메커니즘과 ‘혐오 표현’을 구별하지 못하고, “난 혐오 표현 안 했는데”라는 핑곗거리를 만들어준다. 지금 문제가 되는 건 혐오가 아니라 이준석이 대표하는 세계관 그 자체다. 그의 등장은 단지 ‘혐오 정치인’ 한명의 성공이 아니라 반민주주의적인 국가 권력과 사회적 관계의 지속가능성을 의미한다. ‘시민의 불편’ 따위의 언어가 공적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진정으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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