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모든 게 강자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강자란 정확히 누구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는 드라마와 영화는 부패한 재벌과 정치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평등, 차별, 배제의 직접적 원인이 모두 그들에게 있는 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강자와 약자의 분리에 주의를 기울이면 여러 흥미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상의 다양한 권력자들
강자와 약자의 구별은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가장 익숙한 건 사회 계급이다. 자본주의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나누고, 사회적 권력의 차이를 재생산한다. 이런 불평등의 해소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존재 이유지만, 한국은 오히려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해왔다.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의 생산지가 한국인 건 우연이 아니다. 다수자와 소수자의 구별도 있다. 이는 정상과 비정상, 보편과 특수, 표준과 예외, 주류와 비주류 등으로 표현된다. 이 두가지를 구별하는 가장 흔한 기준은 성, 인종, 신체 조건이다. 한국은 이런 종류의 불평등에도 무관심하다. 심지어 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득표 전략으로 활용한 세력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피지배 계급과 소수자는 근대 사회의 약자를 지시하는 두가지 대표 범주다. 한국사회는 이 두가지 외에도 강자와 약자를 구별하는 새로운 논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다른 사회와 구별되는 한국의 독특성이다. 사회적 갈등 조정, 노동관계와 조직관리, 공적 자원의 배분 등 사회적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강자와 약자에게 권력을 차등 배분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가장 대표적인 장치가 위계 구조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구별은 여전히 사회 조직 다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로 동작한다. 이를 위해 나이, 연차, 지위 등 온갖 기준을 다 끌어온다.
위계 구조 말고도 무궁무진한 장치가 존재한다. 한국사회에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을 때 어떻게 강자와 약자의 구별이 재생산되는지 확인하려면, 플랫폼 노동을 보면 된다. 새로운 노동과 판매 환경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른 서비스 관리 방식이 필요해지자 곧바로 별점제도를 도입했다. 소비자를 강자, 판매자를 약자로 만들고 이들 사이의 권력 차이를 이용해 판매자를 관리하는 거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갑을 관계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다수자와 소수자의 범주로 설명되지 않는 독특한 발명품이다.
극히 다양한 형태의 권력관계가 일상생활 곳곳을 지배한다. 그 구조는 꽤 복잡하다. 예컨대 지하철 노약자석은 교통약자를 위한 공적 재화지만 그것의 분배를 두고 경쟁과 갈등이 발생하자 나이에 따른 불평등한 분배가 일어난다. 노인은 그렇게 노약자석의 강자로 군림하게 됐다. 시야를 지하철 내부 공간 전체로 넓혀보자. 대중교통은 노인에게 매우 불친절한 공간이다. 때로는 노인에 대한 노골적 혐오와 차별 행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노약자석은 노인이 지배하는 공간인 동시에 노인들의 게토이기도 하다. 이런 권력관계의 세부 구조와 역사적 기원이 무엇이든, 중요한 건 평등한 시민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공간 대부분이 복잡하게 얽힌 권력관계로 가득 차 있고, 스스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두가 강자와 약자의 자리를 왕복하며 살아간다.
불편이라는 배제의 논리
차별과 배제를 실행하는 방식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어떤 사회적 문제를 중심으로 갈등이 발생하면, 특정 집단의 권리를 제한하고 나머지에 특권을 부여한다. 그 결과 약자와 강자가 분리되고, 강자의 목소리가 약자의 목소리를 삭제한다. 그럼 ‘시끄럽게 구는 자들’이 사라지고, 갈등은 없었던 일이 돼버린다. 이런 과정에서 자주 사용되는 언어적 도구가 불편과 민폐라는 말이다.
노 키즈 존 카페에서는 아이를 동반한 사람이 약자다. 그의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타인에게 불편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카페 입장이 거부된다. 팬데믹 초기에 코로나19 감염자는 주변 이웃에게 민폐를 끼치는 몰지각한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사회적 배제의 대상이 됐다. 장애인 단체의 지하철 시위를 공격하는 논리도 일반 승객에게 불편을 준다는 거다. 비슷한 논리를 노동조합의 파업이나 시위를 비난할 때도 사용한다.
불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말은 어떤 종류의 현상을 지시할 뿐, 규범이나 가치 판단을 포함하진 않는다. 그냥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불편할 수 있고, 누군가는 내 피부색이나 신체 조건, 혹은 존재 자체에 불편을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불편이 아니라 권리다. 나는 카페에서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이와 함께 공적 공간에 접근할 권리도 있다. 코로나19 감염 여부에 상관없이 기본적 자유를 침해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권리는 장애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에게 보장해야 한다. 집회와 시위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다. 타인에게 불편을 주든 말든 기본적 권리는 권리로서 보장받아야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권리 실행에 필요한 협의와 조정을 거치면 된다.
한국사회는 권리관계에 따라 운영되지 않는다. 그 대신 특정집단의 불편에 특권을 부여한다. 아이를 동반하지 않은 사람, 코로나19 비감염자, 비장애인의 불편은 일어나서는 안 될 피해로 인정하고 아이를 동반한 사람, 코로나19 감염자, 장애인의 불편은 어쩔 수 없는 자연적 효과처럼 취급한다. 결국 약자가 자신의 권리를 정상적으로 행사하면 강자에게 불편을 주는 일이 돼버린다. 약자의 권리는 노골적으로 제한되지만 이런 상황에 저항하는 건 극히 힘들다. 강자의 집단적 목소리가 그들의 저항을 진압하기 때문이다. 불편과 민폐라는 언어는 기존의 불평등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배제를 발명한다.
한국의 불평등은 분명히 독특하다. 불평등은 예외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유일한 형식처럼 작동한다. 불평등이 정상과 일반이고, 평등이 비정상과 특수다. 실제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바로 이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한국사회에서 평등의 실현이란 불평등이라는 예외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불평등이라는 ‘정상적’ 관계를 평등이라는 정상적 관계로 대체하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