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도토리의 집>의 시대적 배경은 1960~1970년대, 일본 사이타마현이다. 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시대에 청각장애와 다른 장애를 중복으로 가지고 태어난 자녀를 돌보는 부모들의 이야기다. 총 7권으로 구성된 만화의 초반부는 낯선 세계와 조우한 부모들의 곤란을 전한다. 케이코는 웃지도 않고 ‘짐승처럼’ 소리 내며 날뛴다. 키요시 역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돌멩이에 집착한다. 이웃 사람들은 수군거리거나 겁에 질린다. 비극으로만 치닫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반전이 일어나는 건 비장애인 부모가 자신의 언어와 세계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던 존재에게도 ‘말과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다.
<도토리의 집 1>의 한 장면 / 한울림
시설로 키요시를 보내게 된 엄마는 노을 지는 다리 위에 멈춰 서서 죽음을 고민한다. 키요시는 늘 그렇듯 홀로 딴 나라에 있는 듯 보인다. 난간 위에 돌멩이를 하나씩 줄지어 올리는 ‘의미 없는’ 일에 여념이 없는 키요시를 절망한 엄마가 다그친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렇게 주저앉은 엄마는 처음으로 키요시의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 그리고 알아차린다. 키요시가 노을을 보기 위해 멈췄다는 걸. 자신의 분신, 또는 친구와 같은 돌멩이에 아름다운 노을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걸.
“키요시의 행동은 모두가 말이에요.”
농학교 선생님이 간절히 전한 이 말처럼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온몸으로 말한다. 비장애인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자기를 표현할 수 없는 존재들은 ‘의사표현을 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2022년의 한국사회에서도 그러한 생각과 곳곳에서 마주친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탈시설 운동으로 시설에 갇힌 장애인들이 지역사회로 나오기 시작했다. 근 1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시설에 수용된 장애인의 수는 유의미하게 줄지 않았다. 그중 상당수가 중증발달장애인들이다. 어떤 이들은 중증발달장애인의 의사결정 능력을 믿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시설만이 집이 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장애인과 평등하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서 가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추우나 더우나 매일 시설의 문 앞에 나와 있던 사람이 있었다. 바깥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얼굴이 새카맣게 타버릴 지경이었다. 어떤 이는 그가 장애 때문에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는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 의문을 품었다. 그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그가 시설을 떠났을 때 풀렸다. 자기만의 집이 생기자 그는 더 이상 문밖을 서성이지 않았다. 놀라운 일은 또 있었다. 그는 집을 자기 식대로 꾸미고(취향을 드러내고) 자신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사를 손님처럼 챙겨주기도 했다(사회적 관계를 형성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시설의 문 앞을 서성인 이유를 깨달았다. 120명이 하나처럼 수용된 거대한 시설에서 오직 그곳만이 ‘나만의 공간’이었다. 그가 거주했던 시설의 또 다른 거주인은 모든 사람의 옷이 한데 뒤엉켜 세탁되는 시설에서 자기 옷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속옷까지 모조리 빨간색만 입었다.
시설은 물리적 학대가 자행되지 않아도 이미 폭력이다. 사람은 자기를 지운 채 살아갈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소통에 관한 비법 또한 알려준다. 말을 알아들으려면 그의 세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믿어야 한다. 그도 우리와 다를 바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