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화 작가의 <불가불가>는 1980년대, 당대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극중극 형식을 통해 날카롭고도 은유적으로 비판한 문제작이다. 1987년 초연 당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으며 국내 연극상을 휩쓸었던 이 작품을 서울시극단이 3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렸다. 동시대의 시선으로 새롭게 그려낸 <불가불가>의 각색과 연출은 그간 <조치원 해문이>, <닭쿠우스> 등을 통해 날카롭고 위트 있는 언어로 고전 비틀기 작업을 이어온 이철희가 맡았다.
연극 <불가불가> / 세종문화회관 제공
35년의 세월을 지나 새롭게 무대에 오른 <불가불가>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원작의 정치적·역사적 무게를 덜어내고 개인의 갈등과 고민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극중극의 형식으로 등장하는 을사늑약, 황산벌, 병자호란, 정중부의 난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1980년대 당시에는 암울하고 억압적인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했으나, 2022년의 젊은 관객들에게는 아무래도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지점이 없지 않다. 바로 이런 점을 고려해 연출은 작품의 정치풍자적 특징보다는 개인의 입장에 방점을 찍었고, 덕분에 <불가불가>는 전보다 훨씬 덜 무거운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작품이 됐다.
이는 작품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배우1과 배우5의 활용에서 도드라진다.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역사적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 채 리허설 중인 배우1은 스스로의 답답함과 연출의 집요한 압박으로 고통받고 있다. 한편 극중극에서 배우5는 역사적 위기마다 ‘불가(不可), 불가(不可)’와 ‘불가불(不可不), 가(可)’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은 채 교묘하게 상황을 빠져나가려 한다. 원작에서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무게에 짓눌린 배우1이 배우5의 비겁함을 응징하기 위해 칼을 휘두르지만, 새로운 버전에서 연출은 이 두 사람을 모두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한 인물로 설정했다. 이로 인해 배우1이 배우5의 목을 치는 행위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을 뚫고 나오는 ‘상징’처럼 그려졌다.
한편 <불가불가> 관극의 또 다른 재미는 이 작품이 지닌 메타 연극적 형식에 있다. 배우들이 모여 공연을 준비하는 연습과 리허설 과정을 통째로 보여주는 구조이다 보니 관객들 역시 자연스럽게 하나의 연극이 완성되는 과정을 참관하게 된다. 실제 자신과 역할 사이를 오가는 배우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어수선했던 대사들이 단단히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볼거리다. 또한 이러한 메타 연극적 특징은 연극과 현실이 얼마나 긴밀히 연결돼 있고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지를 드러냄으로써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나’의 이야기이자 ‘우리 자신’의 이야기임을 암시하는 하나의 장치이기도 하다.
원작에 드러나는 1980년대의 작업환경이 최근의 젠더감수성과 너무 달라 이 부분을 연출이 상당히 디테일하게 각색했다. 원작에서 ‘배우 1~13과 여배우’로 구분한 등장인물을 그냥 ‘배우 1~14’로 동등하게 호명하고, 잔혹한 장면을 남자배우로 교체해 보여주고, 배우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동등하게 그리는 등 세세한 변화를 꾀했다. 원작과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전을 다시 꺼내 이야기하는 이유와 목적을 나름의 새롭고 명확한 비전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한번쯤 들여다볼 만한 흥미로운 무대다. 4월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