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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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우리는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는가?

입력 2022.02.11 17:56

수정 2022.02.1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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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촛불시위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만큼 자주 언급된 문장은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이 문장을 말하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참 역설적인 현상이다. 민주주의는 부정한 정권에 맞서기 위한 언어일 뿐이고, 민주주의의 적이 패배하자 그 언어도 함께 잊고 말았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과연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모델

여기서 잠깐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시스템을 상기해보자. 민주주의(데모크라시)란 ‘인민이 인민 자신을 통치하는 정치 체제’이고, 이는 곧 평등한 시민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 공동체는 두가지 차원의 구별을 전제한다. 하나는 정치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차원이다. 몇몇 철학자는 이 둘을 ‘정치적 국가’와 ‘시민사회’라고 불렀다.

정치적 차원에서 모든 개인은 자유롭고 완전히 평등하다. 즉 그들은 시민이라는 동일한 지위, 똑같은 시민의 권리를 누린다. 평등한 시민의 집단을 인민이라고 부르고, 이들이 민주주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종교, 재산, 고용 관계, 성별, 교육 수준, 사용 언어, 거주지역, 피부색, 나이, 섹슈얼리티 등 수없이 많은 요소가 인간과 인간을 구별한다. 이처럼 정치적 차원을 지배하는 것은 같음의 원리, 사회적 차원을 지배하는 건 다름의 원리다. 이 두가지 차원의 구별이 정치적 근대성의 핵심이다.

이 시스템은 뭔가 기묘하다. 한 개인이 두가지 차원으로 나뉘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저 사람과 나는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이고, 나는 그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 차원에서는 둘 다 평등한 시민이다. 불평등한 사회관계가 현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데, 시민의 평등이 과연 실질적으로 가능할까? 평등은 단지 법 조문에만 존재하는 형식적 선언 아닐까? 근대 민주주의에 내재된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지만, 그렇다고 이게 꼭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0세기 민주주의는 그에 대응하기 위한 장치를 개발해냈다.

정치의 목적은 국가가 사회적 차원에 개입해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가장 기초적 영역이 노동이다. 정도와 형태는 천차만별이지만 현대 민주주의 국가 중 노동시장과 고용관계에 개입하지 않는 나라가 없다. 최저임금, 노동 계약의 형태, 노동시간 등이 대표적 규율 대상이다. 특히 유럽 국가들은 노동을 사회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차원으로 포괄하는 정도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복지국가 혹은 사회국가라고 부르는 모델의 핵심이다.

차별 금지도 근대 민주주의의 딜레마에 대응하려는 기본 장치다. 정치적 차원에는 시민의 평등이 있고, 사회적 차원에는 인간 사이의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차이에 따라 권리를 차별적으로 보장한다면,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위협받는다. 그래서 국가는 사회적 차원에 개입해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규율한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당신은 민주주의에 동의하는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근대 민주주의 모델에 관한 교과서적 설명이다.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자. 한국 시민으로서 이 모델에 동의하는가? 아니라고 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애초에 대한민국 헌법도 그 모델에 기초해 작성했기 때문이다(누군가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이나 ‘한국식 민주주의’를 주장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인민이 인민 자신을 지배하는 체제’일 수 있는지 스스로 논증해야 할 것이다).

동의 여부보다 그것이 과연 진지한 동의인지가 더 중요한 문제다. 정말로 민주주의에 동의한다면, 거기서 도출되는 다른 결론도 수용해야 한다. 예컨대 “성별과 성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수 없다. 민주주의 모델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금지의 구체적 방식에 관한 이견은 존재할 수 있지만, 차별 금지를 부정하는 건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극우 기독교 집단은 저 원칙을 끈질기게 공격하고 있는데, 이를 놔두는 것은 민주주의 부정 세력을 방기하는 꼴이다. 다른 사례로, 근로기준법이 5인 미만 사업장을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 것도 용납할 수 없다. 민주주의 국가는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편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노동법이 권리를 선별적으로 보호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포기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선거로 대표자를 뽑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모델이 도출하는 규칙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고, 그 모델에 부합하는 정치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차원을 구성하는 일이다. 민주주의에 동의한다는 건 이러한 관점에서 현실의 모든 문제에 접근한다는 의미다.

이번 대선을 보자. 거대 양당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노동의 문제에 무관심하다. 유권자 다수가 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흔히 ‘소수 진보정당에서나 다룰 만한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 합의가 존재한다면 이런 상황은 발생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 노동관계가 사회적 차원의 불평등을 강화하면서 시민적 평등을 위협한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장치가 사회보장, 노동법 등이다. 한국에는 정치 상품처럼 소비하는 개별적 복지서비스만 있을 뿐, 국가 모델에 기초한 전체적·체계적인 대응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왜 지금 한국의 시민이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가? 안정적 노동관계에 진입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안정적 주거지를 확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단순히 취직하기 어렵고, 집값이 비싸서가 아니다. 한국의 국가가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에 필요한 사회경제적 관계를 종합적으로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엄밀히 말해 지금 한국에는 민주주의적 선거제도가 존재할 뿐,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무관심한 대통령선거라는 모순적인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다시 자문해야 할 때다. 우리는 정말로 민주주의를 우리의 체제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민주주의의 내용은 정확히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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