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셔널시어터의 인기 공연실황을 스크린으로 상영해온 국립극장의 ‘NT Live’ 프로그램이 이번 시즌부터 범위를 넓혀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과 코미디 프랑세즈의 작품을 포함한 4개 작품을 선보이는 ‘엔톡라이브 플러스’로 새롭게 단장했다. 이중 첫 문을 연 내셔널시어터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고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과 현대적인 각색이 주는 해석의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엔톡라이브 플러스’로 선보이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 국립극장 제공
원작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1897년에 발표한 희곡이다. 오랜 세월 동안 시라노라는 이름은 낭만적인 사랑의 대명사로 각인돼 왔는데, 이는 에드몽 로스탕이 쓴 희곡의 인기에 힘입은 바 크다. 커다랗고 못생긴 코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그가 사랑하는 젊고 잘생긴(그러나 말재주가 빵점인) 청년에게 자신의 시와 편지를 대신 읽게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애틋한 사랑의 전설처럼 회자되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17세기 프랑스의 실존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사실 이런 로맨스의 틀로만 바라보기엔 아까울 만큼 비범하고 흥미진진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17세기 프랑스의 자유사상을 대표하는 문필가이자 사상가로 이름을 날린 시라노는 평생 수많은 결투와 날카로운 풍자시로 적들을 상대하다 죽은, 패기 넘치는 문인검객이었다.
제이미 로이드가 연출을 맡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시라노의 로맨스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러한 문필가·사상가로서 시라노의 면모를 한층 부각시키는 데서 기존의 시라노 해석과는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무대 위 시라노는 꾸준히 연서를 쓰고 읊는 사랑꾼일 뿐만 아니라 창작의 자유와 사랑을 억압하는 모든 이에 맞서 끝없는 논쟁을 이어가는 열혈논객으로 그려진다. 또한 17세기 프랑스 문예를 지배했던 엄격한 ‘운율’ 대신 강력한 비트와 리듬을 지닌 랩의 ‘라임’을 들여오고, 칼싸움 대신 마이크를 활용한 랩 배틀을 여는 등 보다 적극적이고 현대적인 각색이 신선하게 다가와 3시간의 러닝타임이 조금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그 무엇보다 ‘말’의 힘을 믿고 평생 이를 위해 살았던 시라노의 정신을 되살려 연출은 무대 위에 어떤 세트와 의상, 가발이나 소품도 없이 오로지 말로만 모든 장면과 대화를 이어나가게 했다. 모든 존재를 규정짓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시각과 말뿐이라는 사실을 간결한 무대장치를 통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의상과 소품, 무대장치 등 기댈 곳이 전혀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배우들의 대사로만 3시간을 이어가는 공연이다 보니 배우들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임스 매커보이를 비롯해 무대에 선 배우들의 단단한 존재감과 밀도 있는 연기는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0월 내내 펼쳐지는 이번 국립극장 엔톡라이브 플러스에서는 내셔널시어터의 뮤지컬 <폴리스>,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의 <오이디푸스>와 코미디 프랑세즈의 <스카펭의 간계> 등 장르와 언어, 시대와 스타일이 모두 다른 작품들도 해오름극장의 대형 스크린으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