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와 ‘산다’ 사이에 존재하는 ‘첫’
삶은 ‘첫’입니다. ‘첫’은 설렘과 호기심, 흥분의 감정이 들어 있습니다. ‘첫’이 지나면 그 자리에 권태와 무료, 무관심이 차지합니다. 어제처럼 반복되는 지루한 삶이지요. 하지만 매순간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진폭이 크지 않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날들은 늘 ‘첫’입니다. 첫사랑, 첫걸음, 첫 출근, 첫눈 그리고 첫 시집. 1987년 ‘실천문학’ 등단 이후 34년 만에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삶창)를 낸 김용만 시인(1956~ )의 이름 앞에는 ‘노동자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문학의 ‘첫’을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작하고, 일과시 동인으로 오래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온통 녹색인 시집을 펼치면 “임실에서 태어나 완주에서 산다” 딱 한줄의 약력이 보입니다. 쓸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안 쓴 것이겠지요. ‘태어나’와 ‘산다’ 사이에 많은 ‘첫’의 삶이 존재하지만, 시인에겐 다 부질없는 일일 겁니다. 현재의 ‘첫’이 중요하니까요.
김용만 시인과 김용만 시인의 첫 시집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 / 삶창
할머니는 산에 눕고 나는 집에 와 눕고
시인이 전북 완주에 둥지를 튼 것은 5년 전입니다. 한데 작은 회사 “용접사로 삼십여 년”(‘귀향’) 산 시인이 “평생 그리던 시골집 하나 사놓고/ 덜컥 아팠”습니다. 위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연락을 받은 날이 하필 퇴직을 하루 앞둔 크리스마스이브였습니다. 무사히 수술을 받고 정착한 곳이 완주 위봉산 자락의 그 시골집입니다. 시인은 시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우리 마을엔/ 십자가도 없고/ 마트도 없고/ 치킨집도 없”지만 밝은 달과 높은 산, 나무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밤마다 하늘 가득 별이 빛나고 “눈도 많이” 온다고요. 하지만 “만나는 사람이 없어/ 산 보고/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친답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그때의 일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사람 구경하기 힘들긴 하지만 “아내와 아내 지인들이/ 이박 삼일 놀다”(‘여자들은 좋겠다’) 가기도 하고, 대처에 사는 딸이 “밤 열차”(‘고라니’) 타고 오기도 합니다. 하필 “딸 마중 나가다” 고라니를 치지만, 서행하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괜찮았다며 안도합니다. 하루는 “우리 집 두꺼비”(‘두꺼비’)가 도로를 건너다가 차에 치여 죽어 많이 속상해하고, 아침 산책길에 만난 달팽이를 “얼른 집어 건너편에 건네”(‘달팽이’)주기도 합니다.
산중마을에도 이웃이 삽니다. 가장 가까이 “또랑 건너 오두막”(‘산중 풍경’)에 사는 노부부는 “수박 하나 드렸더니/ 들기름 한 병”을 주고, “마을 초입 작은할아버지”(‘메아리’)는 장작을 팹니다. 흙벽 처마 밑 가지런한 장작은 풍경이 됐다가 구들을 덥히겠지요. 산책길에 만난 “학동마을 구 이장님”(‘하느님도 혼나야지’)은 “논 가상이에 자전차”를 세우고 물꼬를 봅니다. 마을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안타까운 일도 생깁니다. “사람들이 모여/ 동네 울력하듯/ 뒷산 양지쪽에/ 다둑다둑 묻”어드렸지요. “할머니는 산에 눕고/ 나는 집에 와 누웠다// 고샅길 하나/ 또, 지워지겠다”는 문장에 한참 눈길이 머뭅니다. 어쩌면 산중마을에 들어와 치른 ‘첫’ 장례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이 꿈꾸는 혁명은
시집을 묶을 때, 여는 시는 중요합니다. 독자와 만나는 ‘첫’ 시인지라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지요. 대표작은 아니지만 일정 수준을 유지하면서 시집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여야 합니다. 시인은 ‘호박고지 마르는 동안’을 첫 시로 배치했습니다. “마당에 가득”한 “초가실 맑은 햇살”을 “몇 삽 담아/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에게 가야겠답니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해 지는 강물을 오래 바라봐야겠다”는군요. 시인은 늙고 아픈 어머니가 많이 신경 쓰이나 봅니다. ‘봄꽃’, ‘눈사람’, ‘장마’, ‘그리고 어머니는’, ‘첫눈’ 등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에 관한 시가 꽤 많습니다. 어머니에겐 2명의 시인이 있습니다. 김용만 시인의 형이 바로 ‘섬진강 시인’ 김용택입니다. 김용택 시인의 시와 산문에도 어머니가 자주 등장합니다. 베어낸 나무에 새끼줄을 걸어 생명을 건네주고, 마당에 뜨거운 물을 뿌릴 때 땅속 벌레들 눈이 멀까봐 눈 감으라 속삭이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가 시인이지요. “시인에게 “어머니는 이 세상 사리”(‘어머니와 호미’)이고, 어머니에게 “첫눈은 자식”(‘첫눈’)입니다.
여는 시에 비해 닫는 시는 귀향 같은 편안함과 울림, 여운을 줍니다. “언제나 지게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난 아버지가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풀씨’)네요. 시집을, 어머니로 열고 아버지로 닫았습니다. 한데 무언가 이상합니다. 제목 자리에 손글씨가 들어가 있습니다. 인쇄 사고가 난 것이지요. 첫 시집이라 더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나무 한그루도 소중히 여기는 시인이 폐기처분 위기에 놓인 시집을 가져와 일일이 손으로 썼을 것입니다. 시집을 떠난 풀씨도 어딘가에 정착했겠지요. 시인은 한때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지금도 그 꿈을 포기한 건 아닙니다. 세상을 마주하는 시각과 생각이 조금 달라졌을 뿐입니다. 자연에 든 시인에게 혁명은 직접 일군 텃밭과 하늘에 감사할 줄 아는 새, 고개 숙인 벼를 따라 “나도 따라 고개를 숙”(‘벼’)이는 겸허입니다. “저 가지런한 가난”(‘시인의 말’)이 지금 시인이 꿈꾸는 ‘혁명’이면서 ‘시’일 것입니다.
시 한편
산
김용만
안개가 산을 감추는 것은
산도 울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 오정국 지음·민음사·1만원
아직도 외진 땅을
떠도는 것 같다.
나를 불러내는 목소리와
나를 걷게 하는
발걸음을
찾아내는 게 힘겨웠다.
밧줄이 치워지지 않는다.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 손진은 지음·걷는사람·1만원
오래 갇혀 있었던 말들을 내보낸다. 이 시들은 과묵했던 문학소년을 길러낸 고향의 정경과 일상의 자잘한 사건들을 내 ‘몫’의 말들로 풀어낸 무늬들이다.
▲맹물은 뜨겁다 | 나영순 지음·한국문연·1만원
천변 미루나무 숲 우듬지 그늘에 앉아 까치둥지를 쳐다보았어요. 십 년 만에 새로 짓는 이소의 거처는 즐거웠어요. 그 자리에 생성과 소멸로 소급될 기억이 무성한 이유겠지요.
▲전화번호를 세탁소에 맡기다 | 임후남 지음·북인·9000원
꽃 피울 준비를 하는 것들은 오늘 춥다고 내일 모레도 계속 추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겨울이 버텨도 봄이 오면 물러나야 할 것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봄이 왔다.
▲포도에서 만납시다 | 진혜진 지음·상상인·1만원
나는 빗방울에 갇혀 있고
너라는 불완전한 언저리를 건드린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하나
이후의
하나
▲두 번째 농담 | 문정영 지음·시산맥사·1만원
4차 5차 산업혁명에
우리는 AI와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
그때에 사랑, 이별, 고통은 어떻게 변할까?
다음 여행은 지구의 기후와 환경에 대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