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김길녀 시인의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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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길녀 시인의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입력 2021.07.23 15:03

수정 2021.07.2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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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수 시인

“열흘은 너무 길다 딱, 사흘만”

죽음은 무채색입니다. 여러 색깔을 덧칠해 무슨 색인지 구별할 수가 없지요. 당연히 그 안을 들여다볼 수도, 안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을 때 ‘급작’이라는 상황이 더해지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황망해집니다. 울음은 ‘마음의 진공’ 다음에 찾아오는 내적 반응일 것입니다. 김길녀 시인(1964~2021)이 삶에서 죽음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겪은 일이지요. 지상에 남겨진 이들의 슬픔과 황망, 흐느낌과 달리 산책을 끝낸 시인은 의외로 덤덤했나 봅니다. 두 번의 암 투병을 한 시인은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애지)이라는 시집을 남겼습니다. 시인은 시집이 나오기 8일 전 우리 곁을 떠났고, 네 번째 시집에는 ‘유고’라는 수식어가 붙고 말았습니다.

김길녀 시인(위)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김길녀 시인(위)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시인의 죽음은 장례라는 의식을 치르고 난 다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내가 아픈 것을, 내 죽음을 주변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는군요. 마음속에서 시인을 보내고 열흘쯤 지났을 때, 저자의 서명 없이 보낸다는 안내문과 함께 주인 없는 시집이 도착했습니다. 한동안 뜯어볼 엄두가 안 나 멀찍이 밀어두었습니다. 강원도 삼척이 고향인 시인은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와 부산에 살다가 서울 홍제동에서 “세 번의 겨울”(‘장소의 탄생’)을 보냈습니다. 시인이 생각한 홍제동은 “눌러앉아 남은 생/ 사과나무같이 늙어가고 싶은/…/여행자들의 발자국/ 긴 쉼표를 찍는 여기”(‘3호선 홍제역’)입니다.

남루하지 않아 더 슬픈 생애

생각난 듯, 소나기가 내리던 날 밤에 시집을 개봉했습니다. 책날개에 약력 아래에 e메일 주소가 있었습니다. 아, 여기로 e메일을 보내면 받아볼 수 있는 건가요. 천국이 그리 가까운 곳이었나요. 간지는 왜 또 검정일까요. 수록된 첫 번째 시는 “내 아픔이 치유되자 그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반성’)라는 단 한 줄입니다. “아픔이 치유”됐다는 것은 몸의 병(病)이 아닌 마음의 병으로, 덤덤하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는 누구일까요. 아무래도 가까운 사람, 가족 중 한 사람인 남편일 것 같습니다. 시인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생각한 게 아닐까요. 시인은 “남루하지 않아서 더 슬픈 누군가의/ 생애를 들여다”(‘오후의 사과나무- 봄’)봤을 것입니다. 암이 재발한 후 경남 밀양집에 머문 시인은 “눈곱쟁이 창문”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감지했겠지요. “서서히 죽어가는 누군가의 일기처럼”(‘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시간이 느리면서도 빨랐을 것입니다.

시인은 ‘수목장 산책’이라는 시를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시인의 바람대로 “생의 긴 시간을 함께한 세 사람”, 즉 딸과 아들 그리고 남편만이 참석해 “장례식 없이” 조용히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형제자매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는군요. 밀양집 주목 아래 묻혀 한줌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시인은 죽음을 ‘산책’이라 했습니다. 이제 고요히 “주목나무와 함께/ 사계”를 느낄 것 같습니다. 한겨울 폭설에 시인은 “더는 가릴 수 없는/ 무덤 천지”라며 “더도 버릴 것도 없는/ 삶의 무게”를 느낍니다. “온몸으로 하늘로/ 하늘로 길을 내”(‘성채’)는 “중국 산성/ 우타이산 가는 길”에 만난 노승처럼 “비로소 고요”해지기도 하겠지요.

묘비명, 미완성 교향곡 1964

묘비명이 빠질 수 없겠지요. 시 ‘묘비명’에는 ‘미완성 교향곡 1964’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1964는 시인이 이 세상에 온 해이므로, 시인의 삶은 “남겨두고 떠나도 좋”을 “못다 부른 노래”입니다. 죽음을 직감한 순간부터 정갈한 죽음을 준비했겠지만,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감정이 만져집니다. “살고 싶어지는 오늘과 죽기 좋았던 어제”(‘장소의 탄생’)만큼이나 심장을 쿡쿡 찔러댑니다. “식물로 태어나 나무로 살아가는/ 오래된 생애”(‘지금,’)가 부러워 수목장일까요.

시인은 시 ‘보들레르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는 저녁’에서 “당신을 만날 어둠을 기다”린다며 “미처 살아내지 못한 생의 행간이 있다면 낯선 땅에서 보내는 긴 휴가 속에서 기꺼이, 다시 시작해 볼까 싶”다고 했습니다. 시 ‘만첩홍도’에서는 “열흘은 너무 길다/ 딱,/ 사흘만/ 내 남자로/ 머물다 가시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겹겹이 쌓은 붉은 문장”의 세계에서 바람을 이루었을까요. “엄마 흉내쟁이 셋째”(‘현모양처’)는 “이쪽 별에서/ 저쪽 별로/ 먼먼 여행”을 떠난 엄마를 만났을까요. 죽음은 안을 보여주지 않으므로 확인 불가입니다. 겨울 지나 봄이 찾아오면, 밀양 주목 앞에 서서 시인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 등이 있다. 제28회 경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과 2018년 아르코창작기금을 받았다.

시 한편
수목장 산책
김길녀

여자는 유언으로 부고 알림
장례식 없이 주목나무와 함께
사계를 느끼고 싶어 했다

여자의 바람대로 생의 가장
긴 시간을 함께한 세 사람
조용하게 여자와 작별식을 가졌다

일 년에 한번 그날이 오면
여자가 애정했던 고요,
아꼈던 찻잔에 담아
하루는 맑게 쉬었다 가시라


[김정수의 시톡](1)김길녀 시인의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시인의 말

▲왜 오늘 밤은 내일 밤과 다른가요
김혜선 지음·파란·1만원

마그리트의 모자를 훔쳐 와
낙타에게
당신에게 씌우고
쓸모없이
날아오를 새를 기다린다.
처음은
내가 없는 줄도 몰랐으니까.

[김정수의 시톡](1)김길녀 시인의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그리움의 총량
허향숙 지음·천년의시작·1만원

매 순간 돌아봄과 넘어짐의 연속이었다. 너 없는 세상에서 숨을 쉬어야 하는 일은 용광로에 던져지는 형벌과도 같았다. 죽여도 죽여도 사라지지 않는 숨 때문에 천년의 잠을 청하며 잠들곤 했었다.

[김정수의 시톡](1)김길녀 시인의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우리의 소통은 로큰 롤
김송포 지음·상상인·1만원

백팔 마리 고양이가
형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목소리로
노래로
혹은 그 너머로
얼굴은 있다, 없다.

[김정수의 시톡](1)김길녀 시인의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각을 끌어안다
김금용 지음·현대시학·1만원

빗장 열고
꽃 피우고 꽃 진 자리
털어내고 길 나서네.

[김정수의 시톡](1)김길녀 시인의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사는 게 다 시지
유기택 지음·달아실·8000원
살았다.

[김정수의 시톡](1)김길녀 시인의 유고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

▲그 오렌지만이 유일한 빛이었네
조혜경 지음·모악·1만원

어떤 기도는 춥습니다.
어떤 기도는 버려졌고,
불에 타거나 부서졌습니다.
이 모두를 어루만지시는
나의 하나님께 이 시집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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