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전문대 나와가 대기업 갈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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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전문대 나와가 대기업 갈 수 있나”

입력 2021.07.19 10:37

수정 2021.07.1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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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현우 용접노동자

중소기업은 이직률이 높다. 나 역시 그 통계 표본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2년 이상 꾸준히 다닌 곳보다 몇달 다니다가 때려치운 회사가 훨씬 많았다. 사람들이랑 안 맞는다거나, 주당 노동시간이 길다거나, 출퇴근에 문제가 많다거나, 단순 노동 강도가 빡세다거나 등. 온갖 일이 겹치다 보면 금방 일하기 싫어지곤 했다. 몸에도 이상반응이 왔다. 근육통이나 불면증에 시달렸고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이 상태가 오래가겠다 싶으면 알아서 사직서 던지고 회사를 바꿔왔다. 뭐든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각자 나름의 원칙을 세우게 마련. 방랑군처럼 중소기업을 전전하던 나는 ‘입사 6개월의 원칙’에 충실하기로 했다. 어느 회사건 6개월만 다닐 수 있으면 장기근속이 가능하리란 마음가짐이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이 원칙을 처음 세운 시절이 바로 산업기능요원 복무 때였다. 반년을 기점으로 병역특례 생활은 적응에서 안정의 단계로 돌입했다. 이는 비로소 노동을 일상에 초대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앞으로의 회사생활이 점차 무료해져 갈 것을 예고하는 복선이었다. 일은 바빠지고 짬밥은 쌓여 딱 실수하기 좋을 무렵. 대형 사고를 하나 터뜨리고 말았다. 프로그램 개발팀에서 제품 내부 설계를 바꾸었다. 그때 하필 부서 간 소통이 미흡해 먹통인 제품 20대가 고스란히 출고됐다. 당연히 매장에 도착한 기계들은 작동하지 않았고, 납품받은 업체 본사에선 난리가 났다. 출고담당인 나는 상무부터 현장 반장에게까지 호되게 야단 들었고, 처음으로 회사생활 때문에 울었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회사 사람들 뵐 낯도 없어 출근이 참 힘겨울 때 마침 기초군사훈련을 하게 됐다. 기뻐 만세라도 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휙 지나간 4주 뒤 회사로 복귀하자, 휴대폰에 1년간 연락이 없던 친구의 번호가 찍혔다. 부산 사는 지인은 4수 끝에 드디어 인서울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마침 훈련소에서 아낀 생활비가 여윳돈으로 남아 있었기에 친구들 모아 축하주라도 돌리자고 했다.

친구의 비꼼에 긴 한숨과 폭음

그렇게 스물셋 남정네 넷이서 한자리에 모였다. 한겨울 따가운 바닷바람이 부는 광안리에서 패딩 하나 덜렁 걸친 채 횟집, 노래방, 펍을 돌며 놀 때까지만 해도 참 즐거웠다. 훈련소에서 막 나오기도 했거니와 재수를 거듭했던 친구가 얼굴 활짝 핀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정말이지 마무리로 칵테일 바만 가지 않았다면 완벽한 하루였을 터였다.

돌이켜보면 4수생 친구는 늦은 사회진출이 내심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4수했는데 또 대학 4년 다녀야 한다며 한숨을 쉬자, 나는 “얼른 나와가꼬 사회인 리그서 보자”라고 했다. 그 친구는 별 뜻 없던 그 말이 무시처럼 들렸나 보다. “니는 참 좋긋다. 졸업 빨리해서 돈도 벌고.” 여기까진 그러려니 했다. “근데 전문대 나와가 대기업 갈 수 있나?” 이쯤 하면 명백한 비꼼이었다. 바에서 흘러나오던 재즈 음악처럼 늘어져 있던 분위기가 단박에 얼어붙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눈싸움만 했다.

결국 먼저 자리를 박찬 쪽은 나였다. “앞으로 연락하지 마라.” 술값을 계산하고 근처 모텔로 가는 동안 긴 한숨에서 뿜어져 나온 입김이 마치 담배연기 같았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진절머리가 났다. 대체 그놈의 학벌이 뭐라고 친구 사이까지 급을 나누게 만드는 걸까? 이럴 거면 공부는 왜 필요하고, 대학은 왜 존재하는 걸까? 앞으로도 이렇게 전문대 나왔다고 무시당해야 하는 걸까? 가슴에 시퍼런 멍이 진 느낌이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 2병과 새우깡을 사서 모텔 안에서 마셨다. 다음날 반나절 넘게 침대 위에서 끙끙댔다.

그래도 해냈다

1년이 지나자 새로운 후배가 들어왔다. 입담이 탁월한 친구였다. 무엇보다 사람 응대하는 능력이 좋았다. 그전까지 수개월 동안 나를 괴롭힌 납품사 사장이 있었다. 제품 몇개 안 사가면서 바라는 건 많은 진상 고객의 전형이었다. 한 번은 전화로 6개월 쓴 액세서리 제품이 고장 났다며 바꿔달라고 역정을 냈다. 이미 사장과 합의한 사안이라고 해서 의심 없이 바꿔줬더니 아니나 다를까, 뻥이었다. 그날 과장한테 또 속았냐고 반에 반나절 정도 혼났다. 

그 진상 사장이 퇴근 시간쯤에 우리 공장에 들렀다. 사장의 악명을 전해들은 후배는 자신이 알아서 구워 삶아놓겠다며 자리를 떴다. 이후 담배 한 번 같이 피우러 나가더니 금세 형·동생 사이가 돼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넉살 좋게 어깨동무를 하더니 “행님, 서울서 내리왔으믄 생선 맛 좀 보고 가셔야지예?” 했다. 그리하여 예정에도 없던 저녁 회식을 하게 됐다. 횟집 탁자 위에 2홉들이 10병쯤 쌓일 때까지 마셨다. 사장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고, 심야까지 비위가 상하는 걸 꾸역꾸역 참아내며 간신히 숙소로 택시를 태워 보냈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 진상짓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런 게 처세술이구나.’ 감정이 부러움을 느낄 사이, 이성은 편할 궁리를 번뜩 떠올렸다.

‘이 친구가 전화 받으면서 서류를 처리하고, 나는 수리만 전담하면 훨씬 시간이 절약되지 않을까?’ 다음날 내 생각을 정리해 과장한테 말했다. A/S 기능 쪽은 제가 맡고, 전화 업무는 후배가 맡도록 하겠다고. 생산 쪽은 피크타임만 합류하면 물량 맞추기엔 문제가 없다고. 말의 근거로 출고 물량과 생산 시간까지 보여드렸다. 과장은 망설였다. 제아무리 생산관리와 계획 개념이 없는 영세기업이라지만, 부서를 오가며 일하는 모습을 위에서 탐탁지 않게 여길까 걱정하는 듯했다. 매우 일리 있는 걱정이었다. ‘유도리’라는 게 원래 그렇듯, 보는 사람 관점에 따라선 그저 ‘가라’로 보일 여지도 충분하지 않은가. 원칙이냐 효율이냐 고민하는 상급자를 끈질기게 설득해 겨우 허락을 받았다.

욕먹을 각오로 일 벌였으니 이젠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 내 예상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내 눌변 덕에 질질 끌리기 일쑤였던 전화는 이제 길어야 5분을 가지 않았다. 시간과 능률을 모두 확보했으니 약발 또한 금방 나타났다. 늘 밀려 있던 A/S 제품이 언제나 재고 0개 상태를 유지했다. 과장이 제일 걱정했던 생산량도 되레 늘어났다. 이득이 금세 숫자로 나타나자 입사 후 처음으로 과장한테 칭찬을 들었다. 뿌듯했다. 이 회사에 오기 전까진 시키는 일만 묵묵히 수행하곤 했다. 좋게 바꿀 수 있는 경우가 보여도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말해본들 대번에 무시당하거나, 그때부터 새로운 발상을 계속 강요당하는 신세가 되곤 했다. 그 경험을 몇 번 반복하자 회사 개선이 내게 어떠한 이익도 주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 한 번의 작은 성공은 꾸준히 쌓였던 내 무기력함을 깬 사건이었다. 그날은 맥주를 잔뜩 마셨다.

천현우는 2011년에 전문대 전자과를 졸업해 중소기업을 전전했다. 청춘 2막이라 생각했던 시기에 찾아온 가난으로 본래 전공과 무관한 용접공이 됐다. 낮에는 쇠를 녹여 제품을 완성하고, 밤에는 생각을 녹여 글을 완성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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